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걱정쟁이 Aug 03. 2017

손원평의 <아몬드>, 정말이지 '영어덜트'하다

어른들을 위한 청소년 배우들

  청소년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 따위 없겠지만, 저는 가장 재밌게 읽었던 청소년 문학을 꼽으라면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을 떠올립니다. 10대 청소년들의 심리와 행동을 그들의 시선에서 너무나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거든요. 어른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닐지라도 그 시간, 그 장소의 청소년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느껴지는 문제들. 어디에도 말할 수 없어 줄곧 끌어안고만 있다가 곪아 들어가는 상처들. 이처럼 청소년들의 위태롭고 설익은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는 다른 작품으로는, 형식은 다소 다르지만 웹툰 <여중생A>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형' '영어덜트'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편집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래서 저는 아몬드라는 작품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작품에 대한 소개 문구 중에는 ‘한국형 영어덜트’라는 문구가 있는데 저는 이게 부정적 의미로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해요. 일단 ‘영어덜트’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저는 책 소개에 있어 왜 이런 의미 불명의 신조어가 동원돼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윤재가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은 어른의 그것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공감 능력이 결핍된 주인공을 감안해야겠지만, 오로지 이성에 의존해 주위를 관찰하는 그 시선은 마치 자신의 시각으로 청소년들의 심리를 재단하는 어른의 시선입니다. 청소년들이 느끼는 미묘한 감정과 위태로운 자의식을 먼저 들여다보기보다, 자신이 체득한 대인관계에서의 매뉴얼과 사실 관계를 앞세워 내려지는 판단. 어린 어른이라는 영어덜트의 의미에 이보다 더 잘 부합하기도 어렵겠죠. 


  ‘감정이 결여된 소년의 성장기’라는 작품의 테마를 감안하면 개연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테마로 인해서, 저는 주인공 윤재와 그가 풀어나가는 이야기 전체가 기능적이라는 의심을 버리기 어렵네요. 즉 윤재가 그런 배경을 지닌 인물로 설정된 것 자체가 ‘공감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작가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사실 모든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어느 정도 기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윤재의 경우는, 그 자신이 주인공으로서 어떤 능동성을 보인다기보다 그저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품 결말부에, 할멈과 엄마가 습격당했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윤재의 마지막 독백은 그 절정입니다. 결국 ‘그렇게 살지 말라’고 독자에게 일갈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윤재에 대해 이렇게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인 사건의 전개와, 마찬가지로 기능적인 다른 등장인물들입니다. 저는 대체 어떤 담임선생님이 학생의 개인사를 그렇게 생각 없이 떠벌릴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그리고 이 인물이 ‘젊은 여자 선생’이라는 설정은 다분히 성역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교수가 왜 하필이면 윤재에게 가짜 아들 노릇을 해 달라고 부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윤재가 대신 칼을 맞아가며 철사에게서 곤이를 ‘구출’하는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된 장면이라는 인상이 드네요.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윤재의 멘토 역할을 자청하는 심 박사, 우연한 계기로 학교에서 마주쳐 윤재에게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는, 남들과는 어딘지 다른 신비한 소녀 도라, 윤재와 곤이의 우정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갈라놓는 냉정한 범죄자 철사. 다들 어딘가에서 한 번, 아니 적어도 열 번은 본 캐릭터입니다. 이들이 등장하는 맥락도 갑작스럽다고 느껴지고, 무엇보다 윤재와의 관계를 빼면 이 인물들에게 있어 남는 부분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물론 1인칭 시점의 한계를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1인칭으로 서술했는가라는 의문이 드네요.


  이 모든 기능적 틀, 즉 하나의 메시지를 위한 기능적 이야기와 기능적 주인공과 기능적 등장인물들 속에서 딱 한 명 살아 숨쉬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곤이일 것입니다. 윤재의 안티테제로 설정됐지만 곤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작품에서 좋다고 느꼈던 장면을 하나만 꼽으라면 곤이가 나비를 괴롭혀 윤재에게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고 애쓰는 장면입니다. 곤이는 단순한 불량학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강요하는 사회를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며 동시에 인간관계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아는 아이입니다. 그러면서도 청소년 특유의 과잉된 자의식과 불안함, 그것을 숨기려는 허세까지 갖추고 있죠. 저는 그래서 곤이의 비중이 이야기에서 더 커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비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윤재가 나중에는 대신 칼을 맞게까지 만든 곤이가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윤재와 어떤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했는지를 좀더 공들여 표현했다면, 윤재의 성장의 의미도 보다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 고리가 될 수 있을 여름방학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고작 몇 줄로 처리되고, 곤이의 자리는 뜬금없이 등장한, 그러면서도 너무나 전형적인 첫사랑 캐릭터가 대체합니다. 그리고 곤이는 갑자기 나락으로 치닫더니 결말부에서 윤재의 정신적 각성을 담당하는 역할로 전락해 버립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이 작품이 청소년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영‘어덜트’ 소설입니다. 어른으로서의 작가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청소년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어른의 시선에서 전달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어른의 문법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른 독자들이 읽기 쉬운 것도 당연하고요. 그런 의미에서는 아까 말했던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이라는 이 책에 대한 소개 문구는 정확합니다. 더 강렬하고 더 흡입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나 드라마의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다만 그 문구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뒷맛만은 어쩔 수가 없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서스턴 클라크, <라스트 캠페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