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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쟁이 Oct 28. 2017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란?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자유롭지 못할 때,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언어로 기능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합의형성의 기제가 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사회의 기득구조와 특권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제에 머무르게 된다. (20쪽)


- 그러한 점에서 앞으로 어떠한 형태의 재벌개혁이든, 그것은 강력한 리더십을 갖는 정부가 넓은 사회적 합의와 잘 조율되고 계획된 개혁프로그램을 갖지 않는 한 어려울 것임을 암시한다. (75쪽)


- 한국에서는 군사주의와 결합된 경제발전주의가 대중적 현상과 결합했다는 사실이다. 온 국민이 궁핍으로부터 열성적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집합적 의지를 표현한 것이 바로 1960~70년대의 대표적인 구호라 할 수 있는 “잘살아보세”라는 말이다. 그 대중적 구호는 정부가 위로부터 주도한 것이었지만 그에 대한 열렬한 대중적 호응을 이보다 잘 표상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81쪽)


-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두 개의 가치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높은 수행능력의 가치이다. (85쪽)


-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을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만 규정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협약(pact)에 의한 민주화, 두 과정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전적으로 운동에 의한 민주화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것은 정치 엘리트간 협약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과정은 확연히 분리되었다. (104쪽)


- 왜냐하면 협약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경쟁의 제도화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내용이라 할 참여의 확대, 즉 경쟁행위자의 수적․질적 확대, 엘리트간 게임의 범위를 넘어 정당과 사회적 기반 사이의 접맥의 확대, 정당간 경쟁의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의 확대 등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민주화라는 거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는, 다시 말해 ‘1958년 체제’의 ‘결빙’을 깨트리는 변화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113쪽)


- 그러나 운동의 약함이 한국민주주의의 구조적 제약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운동의 주체적 역량과 관련된 것으로, 무엇보다 민주화 과정에서 운동이 어떤 대안적 이념과 비전을 발전시키고 이를 공유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119쪽)


- 민주정부의 실패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 기득 이익의 강력함, 여소야대, 지역 기반의 소수자적 협애성 등과 같은 요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민주적 리더십의 약함과 정부 운영 능력의 약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정부의 실패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참여를 확대하고 이를 통한 민주적 국정수행능력을 확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조직적 기반과 리더십을 끊임없이 민주화하는 것만이 집권 민주정부가 유능한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기든스가 강조하듯이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민주화하는 것이다. (122쪽)


- 박정희 모델은 민주화와 더불어 해체되었으나 민주주의하에서도 그 정신은 국가부문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집권 엘리트들이 민주적 발전모델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양자간 대면에서 정부로서의 국가가 관료행정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하부 기반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제 기득 이익으로 자리 잡은 후자의 전자에 대한 반격을 허용한 것이다. (137쪽)


-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분할정부는 리더십과 헤게모니를 상실한 허약한 대통령과 집행부를 한편으로 하고, 사회에서 보수 기득 이익을 뒷받침하고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 헤게모니적 거대 야당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양자 사이의 극한적 권력쟁투를 창출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적어도 집행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의 원리만큼은 확실히 작동하는 상황을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대통령을 권위주의적인 물리적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야당과 의회를 제압하고 견제로부터 벗어나 사회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148쪽)


- 그보다는 제왕적 대통령론의 담론적 형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문제의 원인을 특정 대통령, 특정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현직 대통령을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표면적인 문제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149쪽)


- 승자독식은 대통령제가 수반하는 문제점이라기보다 대통령이 중앙집중화된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지위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감정에 기반한 정당정치는 결국 엘리트 수준에 국한된 정치가 중앙집중화의 구조와 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직접적이고도 필연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 지역에 기반을 갖고 중앙에서 활동하는 지역 엘리트들이 중앙의 정치경쟁에서 승리하여 중앙의 정치자원을 독점하는 동안, 패자가 된 엘리트들은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155쪽)


 - 무엇보다도 그것은 신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에 대한 특정 관점이 우리 사회에 폭넓게 확산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국가의 개입․규제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 정치는 비합리적이고 무능하고 효율성이 없고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반(反)정치적 의식, 국가는 경제의 흐름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으로 나타났으며, 내용적으로는 경제를 주도하는 재벌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 내지는 부정적 견해를 확산시킬 것임은 당연하다. (178쪽)


 -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적 기반은 약화되고 있는 반면,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아직까지도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급진주의에 의해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급진적 이념을 상당 정도 선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노조의 이기주의를 규율할 능력을 갖지 못하며, 우리 사회의 소외 집단과 세계화의 충격을 흡인한 광범위한 사회계층을 대변하지도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도 변해야 한다. (179쪽)


- 한국에서 시민사회는 재산권 최우선의 원리나 시장과 경제적 사적 이익을 옹호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중앙집중화된 정치권력에 반하여 민주주의와 민주적 공적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시민사회는 약한 자유주의적 내용을 갖지만, 반면 매우 강한 민주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4쪽)


- 한국적 상황은 이 같은 서구의 사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국가는 사람이 날 때부터 이미 거기에 존재했으며 사회에 대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가의 우위는 역사적으로 다원적 권력구조를 갖는 봉건제의 경험이 부재한 가운데 오랜 중앙관료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철학적으로는 유교적 전통을 통해 유지되어 왔다. 이후 일제 식민통치의 경험, 분단국가로 귀결된 미군정 통치와 냉전의 경험은 국가의 우위성을 더욱 온존․강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공익에 대한 사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기초는 매우 약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국가와 시민사회 두 영역은 분리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경계선은 모호하며, 시민사회는 국가에 의해 흡수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종속적이었다. (190쪽)


- 서구의 시민사회가 자유주의의 이념적 토대 위에서 발전한 데 비해 한국의 시민사회는 자유주의의 전통이 약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시민사회의 보수적 부문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권위주의하에서 성장한 자신들의 특수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시민사회의 영역 또는 운동의 영역에서 자유주의가 이념적 기반을 갖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시민사회론에는 그것이 집단적 운동을 통해 발전하였기 때문에 평등주의와 급진적 민주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집단주의가 더 우세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보수 세력에 의해 오염되고 비판적 운동 세력에 의해 버림받았다. (197쪽)


- 역으로 시민사회의 운동부문은 중대한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성적으로 구성된 대안적 이념의 창출에 실패하고 있다. 교육받은 도시중산층 중심의 운동이 갖는 이념적 한계는 커지고 있는 반면 노동운동의 약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시민운동이 비(반)정치적 이슈에 천착하는 것도 또 다른 요인이 된다. 더 중요한 요인은 운동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가 다원적이고도 광범위한 시민참여의 계기와 채널을 창출하고 제도화시키지 못한 채 간헐적으로 분출하는 열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시민사회는 공익창출의 안정적 기반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200쪽)


-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합의’는 만장일치의 개념이 아니라, 여러 대안들간의 경쟁을 통해 다수 의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그 결과를 말한다. (중략)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와 다른 것은 사회적 갈등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갈등을 정치의 틀 안으로 통합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간다는 데 있다. 사회적 갈등을 정치의 틀 안으로 가져오고 이를 진지하게 다뤄야 할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전환하여 정치적 결정을 위한 의제로 만드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다. (206쪽)


 - 정당도, 언론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런 조건에서 사회의 중요한 이익과 갈등, 균열이 표출될 수 있는 출로가 점점 좁아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정치사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누적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의 폭발적 분출을 주기적으로 만들어 내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209쪽)


 - 시민사회 내에서 헤게모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재벌과 보수언론 역시 ‘제왕적 대통령론’을 동원하면서 대통령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길 원한다. 이들에게 자신들의 헤게모니와 영향력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힘을 가진 존재는 국가이다. 따라서 이들은 그것이 민주적이든 권위주의적이든 무엇보다 강한 국가, 강한 대통령의 가능성에 반대한다. (218쪽)


- 민주화 이후의 오늘날에는 총체적인 인간보다 ‘부분적인 인간’, 즉 민주적 정치과정에 적극적이되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운동이든, 민주적 정치과정이든 그것이 전부 아니면 전무의 선택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참여자는 정체성을 오래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0쪽)



 학교에서 수업을 그닥 열심히 듣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전공자랍시고 한국 정치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게 평소에 떠올렸던 생각들을 친구들이랑 있을 때 풀어내기도 한다. 물론 전문가들의 식견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겠지만 적어도 언론 정치면의 기사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싶진 않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15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이 책에서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상당수가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승자독식의 사회이며 중앙집중화 역시 15년 전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다. 운동은 쇠퇴일로를 걷고 있고 노동세력은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다. 재벌과 보수 언론 등 시민사회에서 보수적인 영역의 헤게모니 역시 여전히 강하다. 정당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으며, 비록 원내교섭단체가 4개나 있다 하나 크게 보면 참여정부의 후신과 기득권적 보수 세력의 두 가지 계열로 나뉜다. 보수독점적 이데올로기 구도는 다소 약해진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우경화된 바 있고, 국민의당이 그 색깔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는 걸 고려하면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는 아직 건재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결국 지금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상당수는 민주화 당시부터 배태됐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의 이행에 있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운동과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정치권 엘리트들의 협약에 의해 묻혀버렸고 사회에서는 재벌과 보수언론이 군부 정권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생각해볼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한국에서 ‘자유주의’라는 말이 갖는 함의다. 내 정치 성향은 리버럴에 가깝고, 나는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더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자유주의라는 말은 그런 뉘앙스로 사용되지 않는다. 언론 등에서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동원될 때는 주로 경제나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반박하는 경우다. 한국경제신문의 사시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창달’이라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정치적으로 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이 책이 지적하고 있듯 북한의 체제에 대한 반대항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권리는 국가의 안보 또는 체제의 안정에 비해 우선순위가 한참 밀려난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개인은 조직을 위해, 노동자는 기업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지만 진정 국민의 자유가 보장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운동권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내가 운동을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얘기하긴 조심스럽지만... 결론 부분의 ‘총체적 인간’에 대한 비판은 한국 운동권의 문제점을 매우 잘 짚어낸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삶이 없이 오로지 조직과 운동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데, 그런 식으로 몰입하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너무 이질감이 크다. 간단하게 ‘내가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데 너도 같이 해 보지 않을래?’라고 권유받아서 귀가 솔깃했다 쳐도, 그 말을 한 사람이 실제로 운동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대서야 선뜻 고개를 끄덕일 리가 없지 않나. 그나마 학생운동은 일정 정도 선이 그어져 있고 어지간해서 그 선을 넘는 경우가 잘 없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활동가들 대부분이 그런 식인 것 같다. 그만큼 절박하기도 할 것이고 어떤 분들은 그냥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거라고도 말씀하시지만, 그들이 동원해야 하는 대중과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태도 아닐까. 꼭 그렇게 모 아니면 도(사실 도도 아니고 빽도에 가깝다)로 투쟁에 나서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이것은 운동권들에 대한 나의 생소함과 거리감이 반영된 글이다. 나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엔 아무래도 용기가 부족하고,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잘 나서지 않는 편이니까. 다만 최장집 교수가 지적했듯 노동과 운동이 보다 정치적으로 조직화돼서 그 요구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지는데 현재의 방식으로는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정의당과 같은 진보정당들도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낙제점이다. 정치담론보다는 일상적인 문제들에서 출발하는 건 어떨까 싶으면서도, 임금이나 성차별과 같이 지금 한창 논의되고 있는 문제들 역시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기는 매한가지다.


 어쩌면 문제는 논의 대상보다는 논의 방법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보 진영의 활동가들이든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이든 어떤 의미에선 엘리트들이다. 엘리트에게 문제를 던져주고 다짜고짜 해결하라고 들볶을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기층 단위에서 의견을 조직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정당에 의한 정치적 조직화만이 유일한 해결법은 아닌 것 같다. 지역 사회에서 의사결정체를 만들어 공동체의 문제를 처리하는 등 일상에서의 민주적 결정 과정이 사회 전반에 축적되는 것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경험이 일상화된 기반 위에서 노동계급이나 시민사회의 정치적 조직화도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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