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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쟁이 Feb 17. 2019

급전개 속에 쓸려나가는 배우들

야쿠마루 가쿠, 돌이킬 수 없는 약속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 '가가 형사 시리즈'를 좋아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가가 교이치로라는 형사가 주인공이다. 가가는 추리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안락의자형' 탐정이 전혀 아니다. 형사답게 직접 발로 뛰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조각을 짜맞춰 진상에 도달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자연히 그가 등장하는 이야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얘기가 함께 실린다. 각각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했나. 저마다의 얘기가 조각처럼 맞춰져 하나의 퍼즐이 완성된다. 가장 직조가 잘 된 작품이 '악의'라고 생각한다. '신참자'도 재밌게 읽었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아니지만 작가의 대표작인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역시 비슷하다. 가가만큼이나 성실하게 등장인물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장이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 아쉬웠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쉽게 읽히는 건 히가시노 게이고를 닮았다. 문장이 쉽고 전개가 빠르다. 1인칭이기 때문에 절박감도 잘 녹아 있다. 그런데 속도감을 살리기 위해 너무 많은 걸 희생했다.

무카이를 제외하고 작품의 중요 등장인물이라면 노부코, 고헤이, 오치아이 정도다. 하지만 이 셋 모두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철저하게 희생당한다. 노부코는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기능한다. 무카이의 과거가 어땠고 어떤 경위로 지금의 행복을 손에 넣었는지를 설명하는 역할. 고헤이는? 성이 '사토'라는 것 외에는 전혀 힌트가 없다가 막바지에 느닷없이 반전을 위한 장치로 내세워진다. 오치아이도 마찬가지다. 갑툭튀해서 자신의 동기와 방법을 장광설로 늘어놓는데 설득력이 별로 없다. 노부코를 만난 것, 무카이에게 접근한 것, 무려 15년이나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는 것 모두 설명은 하지만 개연성은 부족하다. 그때까지 무카이와 만난 적도 없는 오치아이가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카이가 도쿄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글쎄.


이 소설은 엄밀히 따지면 '추리' 소설이 아니라 '스릴러' 소설이다. 마지막까지 긴박감을 이어나가다 반전으로 뒤통수를 치는 전형적 구조다. 반전의 충격을 위해 복선을 최소한으로 깔아놨다고 넘어가고 싶지만 사실 반전이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무카이의 상황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이라면 당연히 주변 인물 중 한 명이 범인이리라는 건 어떤 독자든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믿었던 정신적 지주가 뒤통수를 친다는 클리셰는 댄 브라운이 너무 많이 우려먹었다. 노부코, 고헤이, 오치아이 각각의 얘기나 심리를 좀더 설명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작가가 그러기는 좀 귀찮았나 보다.


한 출판사는 올해부터 추리소설을 쓰는 기성, 신인 작가들을 발굴해 매년 3~4권씩 출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기자간담회에서 출판사 대표가 "외국 추리소설에 시장을 장악당한 현실이 자존심 상한다"고 했단다. 작년 한 해 서점에 갈 때마다 이 책은 거의 항상 베스트셀러 매대에 놓여 있었다.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라이트한 팬' 정도지만, 올해는 속도감과 깊이가 함께 있는 한국 추리소설 한 권 정도는 나와줘도 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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