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 1000마리 돌파 기념
내 덕질의 유래는 길고 유구하나 생각보다 열중하는 것은 별로 없다. 나는 종종 나를 박식하다고 소개하곤 하는데 여기서 박은 넓을 박(博)이 아니라 엷을 박(薄)이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주워들은 것은 맞으나 실상 깊게 판 것은 별로 없다는 뜻이다. 덕질도 마찬가지라서 무엇 하나 집중해서 오래 흥미를 가져본 기억이 드물다.
하지만 내 덕질의 시작인 포켓몬은 다르다. 어린 시절 포켓몬 게임을 (불법 에뮬레이터로) 처음 접한 나는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정식 정발이 되지 않아 일본어투성이인 게임을 초등학생이 혼자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배워가며 플레이했다(포켓몬 게임은 한자가 없어 일본어 초급자에게 매우 좋은 학습 교재가 될 수 있다).
그땐 그래픽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포켓몬 디자인들도 영 구렸다. 맨 처음 출시된 포켓몬 레드, 그린 버전 시절의 포켓몬 그래픽을 보면 우리는 왜 피카츄가 전기뚱땡이라는 비하 표현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지 알 수 있다. 이브이도 상당히 충격적이고 뮤는 무슨 유전자 실험의 실패 결과물마냥 생겼다(실제로 유전자 실험이 실패해서 탄생한 건 뮤츠다). 2018년 출시된 1세대 피카츄 버전의 리메이크작 레츠고 이브이쯤 되면 슬슬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가 된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포켓몬에 빠져 살았나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좋아하는 포켓몬들을 골라서 데리고 다니며 성장시키는 재미가 크지 않았나 싶다. 한번 스토리를 클리어하면 리셋해서 다른 포켓몬들도 키워보고, 크고 아름다운 전설의 포켓몬들도 한번 써보고, 허약하디 허약한 미뇽을 천신만고 끝에 레벨 55까지 키워 망나뇽으로 만들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레벨 55가 안 된 망나뇽 세 마리를 들고 나오는 목호는 치트꾼이기도 하지만 낭만이 없다, 낭만이).
사실 포켓몬도 알고 보면 꽤나 현실을 반영한 게임이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사실 포켓몬들에게도 '개체값'이라는 게 있다. 사람으로 치면 재능에 해당한다. 피카츄를 두 마리 잡으면 서로 능력치가 다른데, 개체값이 더 좋은 포켓몬이 더 능력치가 좋다. 레벨을 올려도 개체값이 더 좋은 포켓몬의 최종 능력치가 더 높아지게 된다. 그래서 포켓몬을 키워 다른 플레이어(게임 속 NPC가 아닌)와 배틀을 즐기는 하드코어 유저들은 좋은 개체값을 지닌 포켓몬을 키우기 위해 노가다를 한다. 포켓몬을 교배해 알 수십 개를 까고, 태어난 포켓몬들의 능력치를 일일이 확인해 개체값이 나쁘면 버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현실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포켓몬 회사도 플레이어들이 이런 짓거리를 한다는 걸 당연히 안다. 6세대 시리즈 오메가루비, 알파사파이어를 플레이하다 보면 희대의 명대사가 나온다. "아빠가 빌려준 한카리아스로 20연승했어!"
그래도 요새는 시스템이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포켓몬이 개체값이 좋지 않더라도, 특정 아이템을 사용하면 개체값이 좋게 태어난 포켓몬과 능력치를 똑같이 맞춰줄 수 있다. 현실에선 그럴 수 없지만 적어도 게임 속에서는 노력을 하면 천재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게임이 너무 현실에 충실하면 그것도 문제다.
최근 포켓몬의 인기가 많지만 포켓몬이 1000마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작년에 포켓몬 출시 25주년을 맞은 것도, 그래서 포덕들을 위한 특별 뮤직비디오가 제작됐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내 덕질의 비중에서 포켓몬은 앞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나에게 있어 포켓몬의 의미는 너희와는 달라! 어쩌다 한번씩 피카츄를 보고 "귀엽다~"하고 지나가는, 너희와는 다르단 말야! ...라는, 그야말로 찐따의 기운이 찐하게 느껴지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