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에 빠진 4년차 기자의 낙관론
기자가 된 지 만 3년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나는 여러 모로 바뀌었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아졌다는 것일 게다. 정말이지 이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다. 왜냐고? 깊게 고민할 필요 없이, 공들여 쓴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들만 봐도 정나미가 떨어지는걸.
대(對) 문재인 전선을 진두지휘하는 언론사답게 홈페이지의 댓글들은 아주 가관이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사의 댓글 키워드는 단 하나, '문재앙'이라는 단어로 통일된다. 클래식 공연을 리뷰해도 문재앙, 인천 연고 야구단의 역사를 되짚어도 문재앙, 자영업자들이 힘들어도 문재앙,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전망해도 문재앙.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모든 것을 '이게 다 문재인 때문'으로 귀결시키는 그 행태는 소위 '대깨문'들과 무엇이 다른가 싶어 지독한 피로감을 느낀다.
기사 댓글뿐이라면 차라리 그러려니 하겠다. 온라인 공간에서 정신이 병든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조두순이 출소하던 날 새벽, 나는 얼어붙어 가는 발가락을 신발 속에서 열심히 꼼지락거리며 남부교도소 앞에 서 있었다. 교도소에는 전날 낮부터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한몫 잡아보려는 유튜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차마 이들에게 '보수'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민망하다). 아파트 단지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확성기에 육두문자를 늘어놓고, 호송차가 지나가는 길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고 외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인간이 정말 싫어졌다. 안산까지 호송차를 쫓아가 스스로의 밑바닥을 아낌없이 드러내 보인 그들의 행태를 더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
'조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회사 분위기 역시 나의 비관에 한몫을 했다. 우리 부장의 입버릇은 "기자는 조져야 돼." 어떤 일이든 삐딱하게 바라보고 꼬투리를 잡는 게 기자의 미덕이라는 가치관이 만연한 회사다. '비판할 수 있으면 비판하라'는 것인데 나는 그게 맞는지 항상 의문스럽다. 취재하는 사안에 있어 외부인일 수밖에 없는 기자가 과연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지적한들, 그게 얼마나 적확한 지적일까. 과연 그 많은 비판들 중에 전체적인 맥락에 비춰보았을 때 타당한 것이 얼마나 될까.
박원순이 자살했을 때 본지 종합면은 대부분의 언론사들과 함께 '2차 가해'의 심각함에 대해 논했는데 나는 그걸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불과 2년 전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무죄판결 때 본지는 해당 판결이 법리적으로 왜 말이 되는가를 톱 기사로 설명했었는데.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페미니즘의 2차 가해 논리를 내부적으로 수용했었나. 그냥 박원순 자살에 대한 정권 지지자들의 이중적 모습을 비판하기 위해 피상적으로 그 논리를 가져다 쓴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외려 취재 대상을 '조지지' 못하고 대신 회사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을 대변하는 선배들에 대해서 더 삐딱해졌다. 작년까지 모시던 캡이 "너는 어떨 때 보면 엄청 비판적인데 어떨 때는 너무 말도 안 되게 순진하다"고 지적한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정확히는 '회사와 선배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 '취재를 할 때는' 순진하다는 의미였겠지. 이러나저러나 '조짐만능주의'는 내가 이 일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고, 그 '조짐'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낀다.
이렇게 비관에 빠진 채 기자 일을 계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세상이 밝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사람보다는 춥고 배고프고 싸늘하게 보이는 사람이 기사는 더 잘 쓰겠지. 별다른 재미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고 성장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당장 매달 통장에 꽂히는 돈만으로도 회사를 계속 다닐 유인은 된다. 스스로가 행복한가?라는 질문과는 별개로.
문제는 기자에게 필요한 제1의 덕목이 낙관이라는 것이다. 어떤 취재를 하든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사람과 "어차피 안 될 텐데"라고 접근하는 사람은 가능성 자체가 다르다. 어차피 기자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삽질이다. 여기저기를 두들기다 운 좋게 뭔가 하나를 건져 기사를 낚아 올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 애초에 시도를 안 하거나 하더라도 소극적이니 뭔가를 건질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그래서 기자는 참 모순적인 직업이라고 느낀다. 낙관하는 태도가 그 누구보다도 필요한데, 정작 일을 하면 할수록 처음에 가지고 있던 그 낙관은 어디론가 흩어져버리고 비관에 빠져든다. 수많은 기자들이 언시생들을 만나서, 그들이 싫어할 걸 알면서도 "기자 왜 해요? 기자 하지 말아요"라고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
다행히 오늘은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기사를 썼다. 한 연세대 졸업생이 에브리타임에 글을 올려, 어려운 형편의 후배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밥이라도 한 끼 제대로 먹으라고 10만원씩을 보내준다는 기사다. 나름 국내 최고 사립대학 중 하나인 연세대에도 여전히 어려운 학생들이 많더라. 세상이 지독히도 춥게 느껴질 그들에게 누군가는 한 줌 온기를 전한다. 기자 일을 계속하면서 조지는 기사를 안 쓸 수는 없을 것이고 당연히 쓸 필요도 있겠지만, 가끔은 바닥난 낙관을 조금이나마 보충할 수 있는 기사를 써야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