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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시저장 Sep 20. 2023

피카소의 여성 편력? 이럴 줄 몰랐어?

마냥 착한 정신병은 없을걸요?

얼마 전 가디언 지에서 죽은 피카소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보였다. (관련기사) 평소 예술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나지만, 지난 해 바르셀로나에서 피카소 미술관을 가보기도 했고, 피카소에게 여성편력이라는 이슈가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피카소를 평가절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도, 그걸 피카소의 살아있는 손자가 적극 방어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모두 새로운 사실이어서 관심이 갔다.


무엇보다 관심이 갔던 건 역시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피카소가 자신의 연인들을 서로 물리적인 폭력을 써가며 싸우게 만들었고, 두 여성이 그 행위에 '동의'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상황이었길래 피해자로 칭할 만한 두 사람이 거기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이른 바, 가스라이팅의 절정이었던 것일까? 손자는 두 여성이 동의했기에 양해할 면이 있다고 하고, 반대편의 누군가는 그런 행위에 대한 동의는 그 자체로 납득이 불가하다 한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살아생전에 "나에게 여자는 여신 아니면 문지기"라고 공언하고 다닌 여성편력의 대가다운 에피소드라 그저 흥미로웠다.


'그래서 우리는 피카소를 버려야 하나?' (관련기사) 이 질문에 대한 내 개인적인 답은 '이럴 줄 몰랐어?'다. 나는 예술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미술관을 가면 그냥 내 맘대로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피카소미술관에 갔을 때 느낀 점은 '이 사람은 정신분열증이다.'였다. 물론 정신과 전문의도 아니라서 정신분열증이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런 비슷한 정신과적 증상이 있는 듯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집요하게 한 소재를 파고 들지도 못하고, 애초에 저런 화풍으로 표현될 상상력을 발휘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피카소의 능력은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다. 그건 결국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짝꿍이 미술을 좋아하는 덕에 이것저것 주워듣기는 하는 편인데,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그림도 원래는 노란색이 아니었는데 고흐가 노란색을 좋아했댔나 노란색으로 보였댔나 해서 노란 그림이 됐다. 그림이 유명해지고 그 카페는 노란색으로 외부를 다시 칠했다고도 한다. 고흐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빛을 해석하고 색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뭐 하나 일반적인 게 없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으로 말하면 '비정상적'이다. 그래서 더 특별한 작품이 됐고, 사람들은 거기에 수십억을 지불할 정도로 추앙한다.


얼마 전 보았던 김환기 전도 그랬다. 늘 그랬듯 짝꿍에게 끌려가서 김환기 전을 보았는데, 그 사람의 생애는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었다. 무언가에 쫓긴 듯 일생을 그림을 그렸고, 무언가 미술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림과 일생에서 물씬 풍겨져 나왔다. 결국에는 점묘화라는 영역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내고,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가 몸을 지배해 분출할 수밖에 없어 허리가 뭉개질 때까지 구부정한 자세로 커다란 캔버스에 점을 찍어댔다.


"이 사람은 파란색을 많이 썼잖아. 다 하나님을 안 믿어서 우울해서 그래."라고 어떤 중년의 여성이 같이 관람온 아들에게 김환기의 우울을 빌어 신앙을 가르쳤다. '하나님을 안 믿어서' 부분은 동의하지 않지만 특정 시기에 파란색이 많이 보이는 걸 보고 나도 이 사람이 좀 우울했구나 싶었다. 한국 미술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척박한 해외에서 고군분투하고, 종당에는 불행하게도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고 말아 스스로의 몸을 갈아넣는 그의 삶은 비정상 그 자체였고, 그 비정상적인 삶은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 없었을 법한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미술에 관심도 없는 나도 발걸음을 멈출 정도의 임팩트 있는 작품을 말이다.


"와, 저걸 아무도 안 말렸네." 김환기 씨가 생을 마감하게 된 경위를 접하고 이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주변에서는 열심히 말렸겠지만, 분명 부족했다. 이미 허리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이 그림을, 그것도 점묘화를, 그 큰 캔버스에 그리려고 하면 결박을 해서라도 못하게 해야 하는 게 맞는다. 그런데 그렇게까지는 말리지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이 대단한 작품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니까.


그걸 또 우리는 전시를 하고 감탄을 한다. 김환기 씨의 정신병적 삶이 빚어낸 작품을 또 사람들은 좋다고 보고, 거액을 지불하더라도 소장하고 싶어한다. 작품을 만든 화가의 정신병증, 그걸 전시하는 갤러리의 잔인함, 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관람객들의 무심함, 이 중 어떤 것이 정상의 범주에 속할 수 있을까?


그나마 김환기 씨의 비정상은 남에게 무해했다. 광활한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는 작업은 집요함이다. 집요함은 집착으로 발달해 주변보다는 작가 스스로를 해치는 데 공헌했다.


피카소의 비정상은 결이 다르다. 그의 그림은 분열적이다. 정신분열은 남을 해하고, 피카소처럼 예술적 재능이 없다면 두 여인을 서로 때리게 만들 정도의 증상은 애당초 정신병원에서 다뤄질 사안이다.


그래서 누가 피카소를 정신병원에 보낼 수 있었을까? 피카소의 곁에서 그의 작품을 보면서도,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두 여성을 구하고, 피카소를 정신병원에 보낼 수 있었을까? 어떤 개인은 그럴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지 않고 전시관에서 감상하는 이 사회에 속한 이상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그럼 여성 편력이 없는 피카소가 가능할까? 일반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재능은 반드시 단점을 수반한다. 재능만 취할 수 없기에 결국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우리 공동체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결정할 거다. 마냥 착한 정신병은 없고, 피카소와 여성 편력은 언제나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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