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살자
나는 내가 참 어렵다. 다른 건 몰라도 되니까 나에 대해서만이라도 잘 알고 싶은데,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도 도통 알 수가 없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또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해야겠으니 어떻게든 대답해줄 수는 있겠지만 정말 모르겠다. 나는 내가 연애를 하고 싶은지 안 하고 싶은지, 글을 쓰고 싶은지 안 쓰고 싶은지, 대체 아는 게 뭔지, 아는 게 있기는 한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대답조차 진실인지 아닌지 솔직히 나도 잘 몰라서 괜히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거짓말하는 것을 안 좋아하니 이런 질문은 애초에 하지 마시라.
그래서 대학생 때부터 내 소망은 그저 떳떳하게 사는 것이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고, 나중 일도 미리 생각해봤자 별 수가 없으니, 최소한 지금 당장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살자.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떳떳하게는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이 말은 이런 뜻이었다. 실제로 무엇을 하든 간에 내가 부끄러워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어도 내가 보기에 어리석지 않으면 그걸로 된 것이었고, 다른 사람이 손가락질해도 내가 나에게 박수를 쳐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완전히 주관적인 만족에 따라 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 하나 만족시키기가 그렇게 어렵더라. 떳떳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돌이켜보면 나는 단 하루도 떳떳하게 살아오지 못한 것 같다. 별 게 다 부끄럽다. 밥을 먹으면 너무 많이 먹어서 부끄럽고, 운동을 하면 더 할 수 있는데 안 해서 부끄럽고, 영화를 보면 책은 안 읽고 영화만 본다고 부끄럽고, 책을 읽으면 글은 안 쓰고 책만 읽는다고 부끄럽고, 글을 쓰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랑 비교가 돼서 부끄럽고, 글을 잘 쓰지도 않으면서 작가가 되겠다고 말하고 다닌 게 부끄럽고, 애가 참, 나이 먹을 만큼 먹어놓고 부끄러울 것도 참 많다. 자신감을 좀 가져야 될 텐데.
그나마 떳떳하게 살았던 때를 떠올려보자면 공군 기본군사훈련단에서의 훈련병 시절이었다. 기상시간 전에 일어나서 미리 화장실 다녀오고, 훈련 열심히 받고, 군가 열심히 부르고, 혼자 있을 때는 몰래 품 속에 넣어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외우고, 자기 전에는 동기들과 경쟁적으로 팔굽혀펴기를 연습했다. 내일을 맞는 것은 매일 밤 두려웠지만 지나온 오늘에 후회는 없었다. 잠은 항상 달콤했다. 물론 그러다가 발목을 삐어서 구보 열외, 훈련 열외, 대망의 유격 훈련까지 전부 빠지게 됐을 땐 부끄러워서 눈물이 막 흘렀지만, 아무튼 그때는 내가 보낸 하루가 최선이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부끄러운 날들만 살아온 것이 아니었나 보다. 더 떠올려보자면 검정고시 공부한답시고 문제집 펴놓고 앉아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도 떳떳했고, 문학에 미쳐서 하루에 소설 한 권씩 읽어제끼고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시집을 읽던 시절에도 떳떳했고, 좋아하던 여자를 기쁘게 해보겠다고 손편지를 쓰던 시절에도 떳떳했고, A4용지로 한 페이지 반 밖에 안 되는 분량의 에세이를 내 나름대로 완벽하게 다듬어보겠다고 한 달 동안 씨름하던 시절에도 떳떳했다. 아, 그리고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조금 떳떳해지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나 떳떳했던 기억을 많이 떠올리다니. 이 정도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떳떳한 사람이 될 잠재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문제인척하고 있지만, 굉장히 단순한 해결책이 있다. 내가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연애를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연애는 못해도, 그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내면 될 것이다. 연애는 못해도, 이제는 내가 어째서 떳떳하지 못한 지 고민할 게 아니라 내가 어째서 이리도 게으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가, 왜 이래 놓고 또 며칠 못 가는가, 왜 이렇게 글을 대충 쓰는가…. 아아 부끄러워라!
자, 자,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고, 나중 일도 미리 생각해봤자 별 수가 없다. 내일 내가 책을 읽을지 안 읽을지, 글을 쓸지 안 쓸지는 내일의 내가 정할 수밖에 없고, 연애는 내일의 내가 정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미뤄두는 수밖에. 다시 다짐해보자. 지금 당장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살자. 책 읽는 게 뭐 대단하냐고, 글 쓰는 게 뭐 대단하냐고 할 수는 있지만, 나는 이거 좋아하니까 어떡해, 좋아하면 해야지. 이래 놓고 안 하면 또 "책 읽어야 되는데", "글 써야 되는데", 징징대면서 또 돌아와서 비슷한 글 쓸 건데, 이제 너 자신 좀 그만 속이고 그냥 좀 써라,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