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 로고가 사라진 자리, 론스타가 남긴 상처
한 잔의 소주와 한 줄의 장부가 한국 경제사를 바꿨다. 영화 '소주전쟁'과 '블랙머니'는 IMF 외환위기라는 같은 파고를 배경으로, 무너진 주류 왕국과 헐값에 팔린 은행의 비극을 영상에 옮겼다. 두 작품은 실제로 벌어진 매각 과정의 허점·외국계 자본의 탐욕·당국의 부실 감독을 날카롭게 비춘다. 서민의 소주가 재무제표 한 줄로 헤지펀드의 전리품이 되고, 다수 기업이 사모펀드의 ‘먹잇감’이 된 현실은 지금도 오늘의 MBK 사태로도 되풀이된다.
IMF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국내 소주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진로그룹은 급격한 자금난에 빠지게 된다. 1997년 4월, 진로는 국내 최초로 부도유예협약(워크아웃) 대상이 되어 채권단의 관리 아래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을 반복한다. 1999년 OB맥주 등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고도 재무구조는 개선되지 못한다. 결국 2003년 상장폐지, 2005년 하이트맥주 컨소시엄에 3조 4,100억 원에 매각되며 해체된다. 이 과정에서 외국계 투자사와 채권단이 내부 정보를 활용해 인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진로의 핵심 자산이 헐값에 넘어가 국부 유출 논란이 불거진다.
영화 ‘소주전쟁’은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위기 속에서 회사를 지키려는 인물들과 외국계 투자사의 냉철한 계산이 맞부딪히는 과정을 그린다. 표종록(유해진 分)은 국부의 경영진으로, 회사와 직원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다. 외부 자본의 논리와 내부의 무기력 사이에서 고뇌하며 소주 한 병에 담긴 서민의 삶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최인범(이제훈 分)은 외국계 투자사인 솔퀸의 에이스로, 회사의 재무정보와 기밀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인수 과정에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한다. 냉정한 논리와 자본의 힘으로 진로를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대한은행(실제 외환은행)이 BIS 비율 조작 의혹과 내부자의 의문의 죽음 속에서 헐값에 매각되는 과정을 그린다. 실제로 외환은행은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지분 51%를 1조 3,834억 원에 매각한다. 이후 론스타는 배당과 중간매각까지 포함해 총 4조 6,635억 원을 챙기고, 2012년 하나금융에 3조 9,157억 원에 매각하며 막대한 차익을 남긴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매각 승인 지연을 문제 삼은 론스타는 국제투자분쟁(ISDS) 소송을 제기했고, 2022년 한국 정부는 2,800억 원의 배상 판정을 받는다.
영화 '블랙머니'는 실화에 기반해 각 인물의 역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양민혁 검사(조진웅 分)는 대한은행 매각 비리 의혹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인물이다. 의문의 죽음과 금융 비리의 실체를 추적하며, 외국계 자본의 탐욕과 제도적 허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김나리 변호사(이하늬 分)는 금융 범죄와 기업 매각의 법적 쟁점을 담당하며, 양민혁 검사와 협력해 진실을 밝혀내려 한다.
해외 자본의 '기업 사냥'은 단순한 투자 행위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임을 직시해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진로와 외환은행 등 굵직한 기업들이 외국계 사모펀드와 투자자들에게 헐값에 넘어간 사례는 단기 이익만을 좇는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일자리와 산업 생태계, 나아가 국가 경제의 미래까지 잠식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영화 '소주전쟁'에서 최인범이 내뱉은 "대한민국은 돈 벌 자유가 있는 나라 아닙니까?"라는 대사는 시장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가치를 무시하는 비인간적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낸다.
실제로도 외국계 자본은 내부 정보와 제도적 허점을 활용해 기업을 인수하고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 배당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뒤 떠나는 방식으로 국부 유출과 사회적 갈등을 반복해 왔다. 이러한 현실은 '돈을 벌 자유'가 곧 '누군가의 삶을 파괴할 자유'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며 기업 매각과 투자에 있어 시장 논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제도적 견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최근 몇 년간 MBK파트너스를 비롯한 외국계 사모펀드들은 한국 내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인수와 경영권 개입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방식은 주로 대규모 차입(레버리지드 바이아웃, LBO)을 활용해 기업을 인수한 뒤 핵심 자산 매각과 구조조정, 단기 수익 극대화에 집중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행태는 단순한 투자 차원을 넘어, 기업의 장기 경쟁력 약화와 사회적 갈등, 국부 유출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MBK파트너스가 2015년 약 7조 원에 인수한 홈플러스는 최근 경영 악화와 대규모 적자 누적으로 2025년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 MBK는 인수 당시 5조 원이 넘는 차입금을 동원했고, 이후 부동산 매각과 구조조정, 단기 배당 등으로 투자금 회수에 집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는 법정관리 직전 단기 회사채를 일반 투자자에게 판매한 사실이 드러나 투자자 피해와 경영진의 책임 회피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 홈플러스 노조와 시민단체는 MBK가 실질적 회생보다는 자산 분할 매각과 투자금 회수에만 몰두해 10만 명에 달하는 고용과 협력업체 생존을 위협한다고 지적한다.
또 2024~2025년 MBK는 국내 대형 비철금속 기업인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둘러싼 공개매수(적대적 인수합병)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MBK는 대규모 외부 차입과 내부 정보 활용 의혹, 주가 급락을 동반한 공개매수 전략을 펼쳤다. 금융당국은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영풍·MBK파트너스의 자본시장법 등 규정 위반 의혹을 발견하고 관련 자료를 검찰에 전달했다. 이로 인해 고려아연은 단기간에 부채비율이 급등하고, 기업가치와 경영 안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진로 공장 앞에서 울던 노동자, 외환은행 창구에서 눈물 훔치던 후배 행원들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경제의 주인은 누구인가." 소주 한 잔의 위로와 길거리 지점마다 함께한 은행이 탐욕적 숫자 놀음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소주전쟁'과 '블랙머니'가 던진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소주전쟁의 표종록의 대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너희 몇 명 보너스 올려 받자고 길거리에 나앉게 될 사람들, 단 1분이라도 좀 생각해 줘라."
이 한마디는 단순한 영화 속 대사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경고다. 기업의 주인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고 경제의 주인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임을 잊지 않을 때 더 이상 누구도 길거리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분만이라도 더 생각하는 시민의 힘이 우리 경제의 미래를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