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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설

작은 소리에 담긴 청춘의 첫사랑 이야기

by 오후한시오분

영화 '청설'의 한 장면. 손짓과 마음으로 얘기하는 두 주인공의 풋풋한 교감이 담겨 있다. 청설(Hear Me: Our Summer)은 조선호 감독이 연출하고 홍경, 노윤서, 김민주 등 20대의 젊은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 한국어 수어(手語)가 극 중 대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독특한 설정으로,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와 그를 응원하는 언니, 그리고 이들과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청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러닝타임 곳곳에 대사보다 손짓과 표정으로 전하는 대화가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들을 청(聽)에 말씀 설(說), 즉 '듣고 말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한다.

481944758_1071637708102872_4556956995454945262_n.jpg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페이스북

'청설'의 스토리는 꿈도 목표도 없이 지내던 청년 이용준(홍경)이 청각장애인 수영선수를 돌보는 서여름(노윤서)을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면서 시작된다. 곧 여름의 동생 서가을(김민주)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 사람은 소리 대신 손짓과 눈빛으로 소통하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고 각자가 자신의 꿈과 책임, 사랑의 방식을 찾아가는 성장담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청각장애, 스포츠(수영), 그리고 청춘 로맨스다. 독특하게도 이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서사를 이끌고 있으며 각 키워드는 서로의 의미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먼저 청각장애 설정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영화 전반의 소통 방식을 규정하는 요소다. 관객은 주인공들의 손동작, 눈빛, 표정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읽어내도록 유도된다. 이는 장애를 낭만화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로맨스 서사에 색다른 신선함을 부여하는 지점이다. 영화는 청각장애로 인한 소통의 제약을 판타지적 사랑의 장애물로만 그리지 않고 그로 인해 가능해지는 아름다운 순간들도 함께 포착한다. 이를테면, 붐비는 만원 버스 안이나 시끄러운 클럽 한복판에서도 두 사람이 오직 서로의 손짓과 눈빛에만 집중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주변 소음에서 고립된 둘만의 세계처럼 묘사되며 관객에게도 마법 같은 인상을 준다.


스포츠, 그중에서도 수영은 작품의 배경이자 상징으로 기능한다. 수영은 소리 없는 세계에서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징한다. 물속에서는 누구나 소리가 제약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청각장애 선수와 비장애인 선수의 차이가 사라지는 공간이 된다. 극 후반부, 가을의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세 인물이 겪는 갈등과 화해는 스포츠 영화적인 감동과 성장서사의 카타르시스도 느끼게 한다. 특히 여름이 동생의 꿈을 자신의 꿈처럼 여기며 헌신해 왔다는 사실과 용준이 비로소 자신의 꿈을 찾게 되었다는 사실이 교차되면서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으로 청춘들의 꿈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청춘 로맨스는 이 모든 요소를 감싸는 장르적 틀이다. 20대 중후반의 젊은이들이 꿈과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고민, 그리고 첫사랑의 설렘과 상처를 동시에 겪어간다는 점에서 청설은 전형적이면서도 요즘 보기 드문 특별한 청춘 영화다. 장애나 현실의 어려움이 소재이지만 영화 전반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고 오히려 투명하게 빛나는 첫사랑의 희망이 가득하다. 이 점에서 감독은 원작의 순수한 분위기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한국적 청춘의 리얼리티를 더했다고 할 수 있다.


481171697_1071637694769540_162586218127535598_n.jpg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페이스북

이용준(홍경)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뚜렷한 꿈도 직업도 없고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 그의 삶에 불현듯 들어온 여름과 가을 자매는 새로운 활력이 된다. 초반부에 용준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서툴지만 진심 어린 호감표현으로 이를 연기한 홍경의 자연스러운 눈빛과 몸짓에서 청년 특유의 풋풋함이 살아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준의 심리적 성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여름을 향한 진심이 깊어지고 동시에 자신만의 목표를 발견하는 변화로 나타난다. 중반 이후 용준은 여름과 가을 자매의 삶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철없던 청년에서 책임감 있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성숙해 간다. 특히 여름이 자신을 밀어내려 하자 상처받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그녀의 진의를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청춘의 얼굴이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은 홍경의 현실적인 연기로 설득력을 얻었고 한 매체는 "홍경은 판타지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용준을 현실에 발붙이게 만들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480706255_1071637564769553_4451100990565587063_n.jpg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페이스북

서여름(노윤서)은 겉으로는 밝고 단단해 보이지만 내면에 많은 짐을 짊어진 인물이다. 동생 가을과 단둘이 살아온 여름은 스스로 가장의 책임을 떠안고 학업 대신 여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온 생활력 강한 청년이다. 노윤서는 이러한 여름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담담한 표정 속에 미묘한 외로움을 담아냈다. 가령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한숨을 내쉬거나 친구들이 누리는 평범한 대학생활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짧은 시선 등에서 여름의 숨겨진 쓸쓸함이 전해진다. 이런 절제된 연기는 여름이 용준을 만나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한다. 노윤서는 눈웃음과 미소의 점진적인 변화만으로도 여름의 마음이 열리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예컨대, 사람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여름과 가을의 대화를 이어주는 용준의 모습에 안심하고 가을 대신 버스 창 밖의 풍경을 음미하게 된다. 이때 그녀의 표정에는 경계에서 호감으로 바뀌어가는 미묘한 순간이 담겨 있는데 이는 이후 여름이 용준에게 보내는 시선이 이전과 달라진다. 후반부에 여름은 자신을 향한 용준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동생을 먼저 생각하는 책임감과 죄책감 때문에 갈등한다. 이 복잡한 심리를 노윤서는 거의 대사 없이도 얼굴 표정만으로 전달해 낸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여름이 용준에게 거리를 두려 할 때 떨리는 손짓과 흔들리는 눈빛만으로도 사랑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마음을 표현해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러한 내면 연기는 노윤서에게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안겨주었고 평단으로부터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감정을 말한다"라는 호평을 얻었다.


481258663_1071637648102878_7903517820308527990_n.jpg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페이스북

서가을(김민주)은 극의 활력소이자 갈등의 숨은 열쇠인 인물이다. 가을은 어려서부터 청각장애를 가졌지만 당차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언니에게 의지가 되려 노력한다. 김민주는 이 가을 역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는데 농인 연기를 위해 촬영 전부터 수어를 철저히 연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그녀의 수어 동작은 매우 자연스럽고 능숙하며 가을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니 몰래 용준에게 호감을 드러내 보이거나 둘을 이어주려 장난치는 모습에서 천진난만한 매력이 발산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을은 자신의 꿈을 위해 언니가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편에 미안함과 분노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극 중 가장 극적인 감정 폭발은 가을 캐릭터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바로 화재 사건 이후 수영장 신이 그것이다. 이때 가을이 언니 여름에게 울분을 토하는 장면은 영화의 감정적 정점 중 하나다. 김민주는 수어로 "여기 언니 인생이 있어?"라며 취지의 격한 표현을 쏟아내는데 소리가 거의 없는 가운데 격렬한 몸짓과 일그러진 얼굴 표정, 끅끅대는 울음소리만으로 관객을 울리는 힘을 보여준다. 이 연기로 김민주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며 재발견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가을 역의 성공적인 소화는 자칫 조연으로만 머물 수 있던 장애인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세 인물 간의 갈등과 화해를 더욱 극적으로 빛나게 했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청설은 사랑 이야기이면서도 자매의 우애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었고 이 복합적 감정선을 김민주는 신예답지 않게 밀도 있게 표현해 냈다는 평가다.


전반적으로 세 배우의 호흡은 신선하면서도 조화롭다. 실제 모두 20대인 배우들로 구성된 덕분에 인물들의 고민과 감정이 더욱 사실적으로 와닿았다. 홍경-노윤서-김민주라는 새로운 조합은 관객에게도 신선함을 주었고 이들이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케미스트리는 영화의 중요한 매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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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설은 연출, 미장센, 촬영, 편집, 음악과 음향 등 영화적 기법의 조화를 통해 '소리의 부재'를 독창적인 감성으로 보여준다. 특히 청각 중심의 연출과 사운드 디자인이 돋보이는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의 작은 소리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색채와 화면 구성을 살펴보면 영화는 청량한 시각적 톤을 유지하며 청춘의 느낌을 표현한다. 초여름의 맑은 햇살 아래 펼쳐진 수영장과 공원의 장면들은 선명한 녹색과 파란색 계열로 가득하여 싱그러움을 준다. 예컨대, 용준과 여름이 처음 만나는 수영장의 배경은 푸른 수영장 물빛과 흰 타일, 그리고 주변의 초록 나무들이 대비를 이루며 시각적 청량감을 전달한다. 이러한 색채 디자인은 청각적 요소가 줄어든 화면에 시각적 즐거움을 더하는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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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청설의 백미는 사운드 디자인과 청각적 연출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대사와 음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상 소음과 배경음이 빈 공간을 메우는 핵심 요소가 된다. 이는 청각을 열고 세상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가령, 두 주인공이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길을 걸을 때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서걱임, 인도의 발자국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노을 지는 거리의 정적 등 그동안 우리가 스쳐 지나쳤던 소리들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수영장 씬에서는 물속에서 들려오는 물살이 첨벙이는 소리와 물 밖에서 울리는 휘슬 소리, 그리고 인물들의 거친 숨소리 등이 교차 편집되어 스포츠의 긴장감과 청각적 특수성을 동시에 체험하게 한다. 또 여름과 용준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장면에서는 오토바이 엔진음, 바람 가르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와 그들의 해방감과 즐거움을 대변한다. 심지어 용준이 들고 다니는 열쇠가 살짝 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소리마저도 조용한 공간에서는 크게 울려 퍼지며 관객은 마치 그 공간 한가운데 있는 듯한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관객들은 귀 기울여 듣는 체험을 하며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소리들이 얼마나 풍부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관객들은 어쩌면 일상 속에서 당연하게 들릴 땐 무심했던 세상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한 리뷰의 말처럼 영화 관람 후 작은 소리 하나에도 민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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