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4(일)_제시어 글쓰기
퇴사를 했다.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꽤나 힘겨운 일이었다. 처음 일을 그만두었을 때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저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회사에서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빨리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기 싫은 일을 잘하지도 못했다. 퇴사를 하고 무작정 차를 끌고 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바다로 떠났다. 5시간을 운전해서 도착한 바다는 어둡고 차가웠다. 빛이 없는 어두운 바다는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냥 하늘 같았다. 나는 밤을 새워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나는 항상 계획을 세우고 살아왔다. 계획대로 살아왔다. 그러나 퇴사를 한 그날은 계획 없이 살아보기로 했다. 밤을 새우고 일출을 보았다. 붉고 뜨거운 것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생명력이 넘쳤다. 갑자기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획 없이 살기로 마음먹은 지 12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세운 나의 가게는 골목 사이에 숨겨진 작은 가게였다. 많은 사람들이 맛집과 카페를 찾아 배회하는 이 동네에서 쉽게 찾기 힘든 골목에 숨어 있는 가게였다. 어쩌면 내 스스로 숨은 걸지도 모른다. 관심받고 싶지만, 너무 관심받는 것은 또 무서운 그런 심리랄까. 얼마 남지도 않은 나의 친구들은 장사를 할 생각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묻곤 했다. 그럼 나는 제품을 팔지만, 장사를 할 생각은 없다는 대답을 했다. 친구들은 너답다며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나는 나의 가게로 향하는 이 골목을 좋아한다. 특히나 이 골목의 여름을 좋아한다. 이 골목의 담벼락이 나팔꽃으로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의 나팔꽃은 오늘 하루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나는 말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이 말하면, 나는 듣고 그저 웃거나 대답했다. 힘들어도 슬퍼도 말을 잘하지 않았다. 기뻐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 버릇하다 보니 어느새 계속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은 그저 그렇게 나에게 적응해버렸는지 모른다. 그런 나는 여전히 어리고,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소년 같았다. 그래서 나의 가게 이름을 [말이 없는 소년]이라 지었다. 이 가게가 그냥 나 같기를 바랐고, 이 가게가 그냥 나 같았다.
우리 가게의 문은 큰 철문이었다. 철문이 닫혀 있으면, 가게가 영업을 하지 않는 줄 알고 많은 손님들이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처음엔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의 가게에 들어오려면 저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올 정도의 정성이 있어야 한다. 오만이었다. 장사는 하기 싫었지만, 물건은 팔아야 했는데. 물건도 팔 수 없을 지경이었다. 놀러 왔던 친구가 정 그렇게 철문을 달고 싶으면, 문에 창문이라도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든다며, 철문에 창문을 만들었다. 우리 가게의 내부가 어느 정도 보이는 적당한 크기의 창문이었다. 문이 열리면 맑은 풍경소리가 나길 원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는 현관문에 풍경을 달아두었다. 집에 누군가 들어오면 맑은 소리가 나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들어오는 사람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풍경을 하나 주문했다. 초승달 모양의 나뭇조각에 컵이 올려져 있는 형태의 풍경이었다. 한쪽이 자석으로 되어 있어 설치도 간편했다. 철문을 고집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여름의 햇볕이 뜨거워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을 때, 아주 맑은 풍경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내 기분도 맑아지는 순간이다. 나는 철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혁아! 더워서 들어왔다. 근데 여기도 덥네?"
"그럼 나가줄래?"
"아니다. 조금 있으니까 시원하네."
맑은 소리와 달리 별로 맑지 않은 사람이 들어와 기분이 조금 언짢았다. 성원이었다. 성원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중학생 때 처음 만난 성원이는 말이 정말 너무 많은 소년이었다. 당시 14살 인생에 만난 사람 중에 제일 말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말이 전혀 없는 소년이었다. 성원이의 말에 다들 고막에서 피를 토하며 그를 외면할 때, 오직 나만이 멀쩡히 고막을 유지했다. 선천적으로 듣는 것에 익숙했나 보다. 성원이는 그런 나를 항상 따라다니며 말을 했다.
"혁아, 점심에 여기 근처에 텐동집 가서 밥 먹었는데. 거기 가지 마. 왜? 맛이 없으니까. 진짜. 너무. 맛이. 없어."
그렇게 성원이는 가끔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한다. 나는 그런 성원이를 무표정으로 바라본다.
"혁아, 너 밥 먹었어? 여기서 일하면 밥 어떻게 먹냐? 도시락 먹나? 집에서 싸와서? 아니면 편의점에
서 좀 사 오나? 아니면 배달시켜 먹나? 아, 근데 배달시켜 먹으면 좀 헤비 하기도 하고 식비도 만만히 볼 수 없겠어. 그렇다면 도시락을 시켜 먹는 것이 가장 유력한데. 도시락 먹었겠구나?"
"응."
"그치? 그럴 줄 알았어. 학교 다닐 때도 너 도시락 들고 다녔잖아. 다른 애들 다 급식 먹을 때. 오늘도 밥 위에다가 계란 후라이 하나 싹 올려갖고 그치?"
"응."
"혁아, 여기 텐동집 있잖아. 아니, 무슨 밥에다가 무슨 기름을 넣은 맛이 나더라. 튀김이랑 밥이 따로 노는 느낌? 알아? 아니 그래 가지고, 튀김 따로 밥 따로 먹는데. 너무 느끼하고. 어?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내가 텐동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 그리고 또 깨달은 것은, 여기 텐동집은 진짜 맛이 없다는 거야."
"응. 그렇구나."
"아, 혁아! 나 잠깐 들어온 거라 다시 나가봐야겠다. 다음에 또 놀러 올게! 아 맞다. 이거는 저 앞에 있는 카페에서 사 온 건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마카롱이야. 먹고 힘내라. 간다!"
맑은 풍경소리와 함께 성원이가 들어왔다가 다시 맑은 풍경소리를 남기고 정신없이 성원이가 나갔다. 가게가 다시 고요해졌다. 성원이가 두고 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산미가 아주 약간 있는 아메리카노였다. 한 모금 목으로 들어가니 성원이가 가게를 나간 것만큼 시원했다. 마카롱은 너무 달지 않고 적당했다. 너무 끈적하지 않고 적당했다. 성원이가 가게를 나간 것만큼 적당했다. 성원이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커피랑 마카롱 맛있다. 고마워.]
금방 답장이 왔다.
[혁아, 그 커피랑 마카롱이 진짜 이 근처에서 제일 유명한 건데. 내가 너 주려고 줄 서서 기다려서 산 거야. 보통 커피가 산미가 진하거나 아예 없거나 그렇다나 뭐라나. 나는 커피 잘 몰라서 모르는데. 여튼 여자 친구가 여기서 꼭 사라고 추천해 줬거든? 맛있다니 다행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네. 힘내고! 항상 응원한다!]
눈에서도 피를 토할까 봐 급하게 스마트폰의 화면을 꺼버렸다. 그때 다시 맑은 풍경소리가 들려 철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의 여자 손님이었다. 그녀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고,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묶었으며, 두세 번 접은 블라우스 덕분에 보이는 손목에는 은색 메탈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누군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10년 전, 내가 좋아하던 서윤이었다.
"어! 혁이?"
-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 면접 보러 왔는데요."
서윤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이미 일을 하고 있었고, 서윤은 일을 구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우리 학교 근처의 작은 디저트 카페였다. 우리 카페에서는 나와 함께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 그만두면서 새로 사람을 구했는데, 그날 면접을 보러 온 것이 서윤이었다.
"아, 잠시만요."
카페 안쪽에서 잠시 앉아서 쉬고 계시던 사장님께 면접 이야기를 전달했다.
"아, 그래요?"
사장님은 일어나 카운터로 나오셨다.
"반가워요. 여기 잠시 앉으세요."
사장님은 서윤에게 매장의 한쪽 테이블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하고는 마시고 싶은 음료가 있는지 물었다. 서윤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장님께서는 이 더운 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이 카페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음료로 준비해 주겠다고 하셨다.
"혁이 씨. 요거트 스무디 하나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해요."
사장님은 나에게 음료를 부탁하고는 자리에 앉아 서윤이와 대화를 나눴다. 일하는 시간이나 시급과 관련해서는 이미 다 알고 왔기 때문에, 서윤은 좋다고 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보건증도 이미 갖추고 있다며, 준비된 직원임을 강조했다.
"좋아요. 그럼 혹시 궁금한 점은 없나요?"
"음, 이 카페 이름은 왜 [봉봉]인가요?"
나도 조금 궁금하긴 했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내용이다. 사장님이 애완동물을 키우나 싶었지만,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워낙 말이 없는 소년이었으니까.
"아, 이 카페 이름은 말이죠. 우리 첫째의 태명이었어요. 봉봉이. 귀엽죠?"
사장님은 아주 멋진 중년의 남성이었다. 나보다도 훨씬 어린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존댓말을 해주셨다. 사모님과도 금술이 아주 좋았는데, 두 분이 같이 카페에 있으면 괜스레 보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은 늠름하게 자라서 군대에 갔답니다."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매일 집에 있다가 없으니까 허전하긴 합니다. 하하"
서윤은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후에 사장님과 몇 분 정도 대화를 나눈 후 서윤이의 면접이 끝났다. 서윤이는 절반 남은 요거트 스무디를 들고는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카페를 떠났다.
"혁이 씨. 내일부터 서윤 씨가 출근할 거예요. 잘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말이 없는 만큼 표정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면접을 보면 매번 좋은 소식을 듣지 못했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면접을 보고 아예 다른 종류의 알바를 구하자고 마음먹은 곳이 이 요거트 카페였다. 사장님은 나를 채용했고, 이날은 서윤이도 채용했다. 덕분에 나는 그렇게 처음 서윤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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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아. 나 기억나?"
"어, 서윤아."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한가득인데, 그 질문이 너무 많아서 어떤 질문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내가 원래 너무 말이 없다 버릇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잘 지냈어? 가게를 차렸네? 신기하다. 네가, 잡화점을 차리다니."
"응. 그렇게 됐네. 살다 보니."
나는 어색하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게 얼마 만이냐 진짜. 10년 만인가? 너무 신기하다. 너, 스타일이 많이 변했다?"
"어, 그렇게 됐어. 살다 보니."
"말이 별로 없는 건 여전하네. 어때 가게는? 할만해?"
"응. 나쁘지 않아."
"오. 멋진데 혁이. 진짜 반갑다."
"나도. 정말 반갑다. 아 마카롱 하나 먹을래?"
"오, 이 마카롱도 파는 거야?"
"아, 아니야. 이건 친구가 주고 갔어."
"고마워. 잘 먹을게."
나는 서윤에게 연두색의 마카롱을 하나 건넸다. 그녀는 한입 베어 물고는 눈을 크게 뜨고는 맛있다는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그녀는 여전히 밝았고, 여전히 예의 발랐고, 여전히 이뻤다.
"맛있다. 진짜. 고마워. 나 가게 좀 구경해도 돼?"
"아, 응 그럼. 천천히 둘러봐. 볼 건 많이 없지만."
"많이 없기는, 구경할 게 산더미구만."
그녀는 미소를 살짝 짓고는 가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만난 서윤이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나의 가게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안경테를 거치해둔 지점에서 멈추었다. 잠시 몇 개의 안경테를 들어서는 써보고 거울을 보고 하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혁아, 기억나? 예전에 내가 너 안경테 골라주고 그랬었는데 그치?"
"응, 기억하지."
"내가 또 안경테 고르는 능력 하나는 기가 막혔었다 그치?"
그랬지. 그 외에도 많은 능력이 있었지만. 안경테 고르는 능력은 그중에서도 탁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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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아, 혹시 안경테 바꿀 생각 없어?"
"글쎄."
"내 생각에는, 너의 얼굴형 하고는 안 어울리는 거 같아. 일 끝나고 나 따라와 내가 골라줄 테니까 한 번 믿고 바꿔봐."
"음, 그래."
서윤이는 일이 끝나자 나를 끌고 꽤나 혼잡한 번화가로 나를 데려갔다. 골목골목에는 많은 가게들이 있었다. 거리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들도 즐비해있고,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바다를 이뤘다. 마치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듯 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거리를 걸었다. 마침내 우리는 보세 옷들을 잔뜩 파는 옷 가게의 문턱을 넘었다.
"혁아, 이거 써봐."
서윤이가 골라준 것은 검은색의 네모난 뿔테 안경이었다.
"아, 별로네.
"그래?"
시력이 나빠 흐릿하게 보이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별로였다. 서윤이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다시 다른 안경테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짙은 갈색의 얇은 뿔테를 손에 들었다. 안경테를 들고는 내 얼굴에 대어 보고는 말했다.
"이거다 혁아. 이거 써봐."
나는 안경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안경을 썼다.
"이거야. 거울 봐봐."
거울은 봤지만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어때? 잘 어울리지? 내가 볼 때는 이게 딱이야."
"응, 잘 어울린다."
거울에 보이는 서윤이가 골라준 안경테를 쓴 내 얼굴이 흐릿하지만, 괜찮아 보였다. 그냥 서윤이가 안경테를 골라줘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혁아. 지금 쓰고 있는 무테안경도 괜찮은데, 지금 내가 골라준 이 뿔테가 훨씬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응, 고마워."
나는 내일 아침에 안경점을 가서 안경테에 맞게 렌즈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혁아. 내가 안경테 골라줬는데 뭐해줄 거 없어?"
서윤이는 나에게 얼굴을 내밀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다.
"음, 커피 마실래?"
"그래, 커피 마시자."
서윤은 미소를 짓고는 나를 카페로 데려갔다.
"카페에서 일하는데, 다른 카페 와서 커피 마시는 거 좀 웃기다."
"뭐, 그냥 일이니까."
서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도 따라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서윤이가 주문하는 것을 따라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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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아, 걔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안경테를 골라주고 카페를 갔다고? 단둘이? 여자랑? 네가? 말 없는 네가?"
"응."
"네가 먼저 골라달라고 한 거야? 말이 안 되는데? 걔 이쁘다며?"
"응 이쁘지."
"근데, 너한테 먼저 안경테를 골라주겠다고 하고, 카페를 가자고 했다고?"
"정확히는, 카페는 내가 가자고 했지."
"아니, 근데 먼저 커피 사달라고 했다며."
"음, 내가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지."
"그게 그거지. 이야. 혁아. 너. 너는 어때? 걔 좋아해?"
나는 아직 내 마음을 잘 몰랐다.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 나면 상처받으니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상처받으니까. 외면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너, 너 좋아하네. 걔. 얼굴 빨개진 거 봐."
성원이는 빨개진 내 얼굴을 보고는 나를 놀렸다. 성원이는 사진 없냐며 나를 보챘다. 나는 딱히 서윤이의 사진을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었고, 있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성원이는 진짜 이쁜 거 맞냐며 계속 캐물었다.
"진짜 이쁘다니까."
성원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성원이가 말을 멈추는 순간도 있구나 싶어 조금 놀라웠다. 성원이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 시간이 길어지니, 성원이가 말을 멈추지 않는 순간만큼이나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이 자식. 완전 빠졌구만 빠졌어. 눈이 아주 하트가 됐어. 너도 드디어 사랑에 빠졌구나 혁아. 사랑니는 안 빠졌어도, 사랑에는 아주 깊이 빠지셨어 우리 혁이. 혁이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내가 다 뿌듯하다. 그래서 언제부터 사귀려고?"
"아니 뭘 사귀어. 걔 나 안 좋아해."
"그건 모르는 거지. 세상 어떤 여자가 아무 마음도 없는 남자한테 안경테를 골라줘? 안 그래? 너는 아무 관심 없는 여자한테 안경테 바꾸자고 직접 골라줄 수 있어?"
"없지."
"거봐. 그렇다니까?"
"여자는 다를 수 있지."
"아이고. 이 자식 또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 한다. 여자도 사람이야. 똑같다니까?"
"너 여자 안 사귀어 봤잖아."
"... 응?"
성원이는 너무 말이 많은 나머지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연애를 인터넷으로 배운 것이 틀림없다.
"약간 심장 아려온다 혁아? 촌철살인이 아니라 그냥 살인이네 이거."
성원이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술잔을 들었다.
"그래, 술이나 한 잔 때리자. 오늘 마시고 죽자!"
그렇게 상남자 같은 멘트를 날리며 성원이는 잔에 가득히 담겨있는 분홍색의 딸기 소주를 벌컥 들이켰다.
"야, 달다."
달겠지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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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고 있는 안경테 직접 고른 거야 혁아? 엄청 잘 어울린다."
"응. 고마워."
"패션이 많이 변했다. 멋지네."
"너도 여전히 옷 잘 입네."
"너, 보는 안목이 늘었구나? 근데, 오늘은 그냥 가볍게 입었어. 내가 힘주고 꾸민 날을 한 번 봐야 할 텐데."
서윤이는 자신 있게 말하고는 멋쩍은 듯 웃었다. 이제는 안경테 부분을 지나 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와. 책도 파네?"
"응, 주변 지인들 책이랑 해서 몇 개 팔고 있어. 독립 서적이야."
"오, 이 책 제목 재밌다. [계획 없이 살기로 마음먹고 12시간 만에 세운 계획]."
"음, 그건 내 책이야. 쑥스럽지만."
"아 진짜? 나 이거 사야겠다."
"별 내용 없어. 그냥. 에세이야."
"궁금하다.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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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아. 나 할 말 있어."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 두렵다. 또 어떤 방식으로 나는 상처를 받게 될까.
"응."
"있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 같아."
서윤이는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였다. 혹시 그게 나일까 하는 기대를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내가 물었다.
"어떤 사람인데?"
"혁아. 네가 남자의 입장에서 한 번 말해줘 봐."
평소 말이 별로 없는 내가 과연 말을 잘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과 선배인데. 같은 강의 듣거든. 이번에 같은 조가 되면서 알게 됐거든."
"응."
"나도 원래 얼굴만 아는 선배였는데, 이번에 조별 과제하면서 얘기도 해보고 하니까 엄청 어른스럽고 좋은 사람 같더라고."
서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선배와 같이 밥을 먹은 이야기. 그 선배가 했던 문자메시지. 그 선배와 전화했던 이야기. 그 선배와 카페에 갔던 이야기. 그 선배와 술을 마신 이야기. 그 선배가 자신의 집까지 데려다준 이야기. 그 선배가 사준 떡볶이.
"남자가 봤을 땐 어때? 그 선배가 나 좋아하는 거 같아?"
"넌 어때?"
절대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조금은 부정적인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는 내 마음에 자괴가 왔다.
"그 사람 보면 떨리고, 약간 말이 잘 안 나오고 그래. 내가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내가 봤을 땐, 그 사람이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정말? 남자가 봐도 그래?"
"응."
"너한테 말을 하고 나니깐 마음이 편해졌다. 고마워 혁아."
나는 괜히 성원이가 원망스러웠다. 인정하지 않고 있던 내 마음을 괜히 흔들어 놓은 성원이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계속 인정하지 않았다면, 지금 괜찮았을 텐데. 계속 외면하고 지냈다면, 지금 이 자리가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성원이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원망할 사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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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했어?"
"결혼은 아직. 아마 지금 만나는 사람하고 결혼할 것 같아."
"잘 됐네. 오래 만났어?"
"3년 정도?"
"꽤 오래 만났구나."
"응 그렇지. 혁이 너는?"
"나도 아직."
"만나는 사람은 있어?"
"음,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그렇구나. 또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서윤이의 카드를 받아 내 책의 구매대금을 결제하는 동안 잠시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보다시피, 내가 안정적이지 않다 보니 연애도 결혼도 좀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아."
나는 책을 갈색 종이봉투에 담아주면서, 사진엽서를 한 장 넣어주었다.
"책 구매하는 손님들에게는 이 사진엽서를 함께 넣어주고 있거든."
"아 그래? 이 사진 멋있다. 이 사진도 혁이 네가 직접 찍은 거야?"
"응, 다시 계획을 세우기로 마음먹은 날 찍은 사진이야. 이 사진 보면 그때 생각도 나면서 힘이 난다고 할까."
"진짜 역동적이다. 일출. 구경 잘했어 혁아. 가게가 너무 아늑하고 이쁘다. 종종 들를게."
"그래, 편하게 와."
서윤이는 우리 가게의 철문을 밀고 나가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오른손을 살짝 들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맑은 풍경소리가 울리고 서윤이의 모습이 철문의 작은 창문을 통해 멀어졌다. 그렇게 서윤이는 [말이 없는 소년]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