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더라도 결승선을 밟고 지는 게 낫다
강지영 아나운서의 에세이 <때로는 간절함조차 아플 때가 있었다>를 읽다가, 책장을 넘겨 마주친 문장에 문득 어렸을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창피당하기 싫어서', 더 정확하게는 내가 못 하는 걸 남들에게 들켰을 때 망신 당하는 게 싫어서 내가 잘 못 할 것 같은 일은 웃음으로, 핑계로 넘기며 피하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방과 후 시간에 학교 근처 트랙이 있는 산책로에서 단체 육상 연습을 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출발선에 서서 선생님의 '땅!' 소리를 들으면 일직선으로 뛰어가는 간단한 연습이었는데, 그날 나의 상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나는 웬만한 운동을 반 친구들보다 잘했다. 특히 한 번도 진 적 없는 달리기는 내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출발 소리가 들리고, 힘차게 달리기 시작하는데, 얼마 안 되어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달리는 도중 그 몇 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에 나는, 내가 질 거라는 걸 직감하고 결승선에 다다르기도 전에 서서히 힘을 뺐다. 나는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졌다고 보이길 원했다.
지금 돌아보면, 중학생 여자애가 같은 육상팀 남자애한테 달리기를 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전혀 주눅 들 필요도 없었고, 졌다고 상심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결과를 마주하기 두려워 본능적으로 포기를 선택했다. 그것도 실전이 아닌 연습 게임에서, '창피하다'는 이유로 경주를 포기했다.
사춘기 어느 하루에 일어난 일상적인, 몇 초도 안 되는 순간의 사건이었지만, 내 기억에는 오래 남았다. 나는 왜 달리기를 멈췄을까, 왜 끝까지 뛰지 않았을까,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무엇이 창피했던 걸까.
그때의 나는 비겁했다. 나는 끝까지 달렸어야 했다. 지더라도 결승선까지 최선을 다해 뛰었어야 했다.
여러 계기와 요인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성장하면서 차츰 나는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덜 쓰기 시작했다. 타인이 아닌 나와의 경쟁을 하니 별로 창피할 것도 없었다. 시험 문제를 틀려도, 대회에서 떨어져도, 경쟁에서 져도, 난 결승선까지 내 페이스대로 최선을 다해 뛰었으니까, 부끄러울 게 없었다.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면서 내가 제일 잘한다고 자부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평범해졌다. 어딜 가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그때마다 내가 체면을 지키려 편하고 잘하는 일만 선택했다면, 난 출발선과 결승선 사이, 그 어중간한 곳을 맴돌았을 것이다.
이제는 경주에서 지는 것보다 도망치는 게 더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더라도 결승선을 밟고 지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