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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꽃쌤 Jan 14. 2019

'공부를 잘한다'는 건 뭘까?

-혁신학교의 학력 논란과 설치 찬반 논쟁,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보며


2017년 2월, 첫 수업혁신학년을 마무리하며 여러 생각과 감정들로 착잡했다. 지난 1년간 수많은 추억을 함께 했던 아이들과 때가 되어 헤어져야하는 것은 몇 달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지만 쉽지 않았다. 한 덩어리의 ‘5학년 1반’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학습 활동과 체험 속에서 나와 일대일로 만났던 아이들 ‘한명 한명’과 헤어지는 것이라 떠오르는 얼굴마다 그 추억의 결을 타고 마음이 한가닥씩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혔던 건 ‘강새원(가명)’이었다.    




어둡고 주눅 든 표정의 새원이는 늘 말이 없었다. 하지만 느낌이나 생각을 묻는 활동지에 한 두 문장씩 써놓은 대답이나 교사와의 대화 중 보여준 그 아이의 감수성이나 사고의 깊이는 새원이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새원이는 팔색조처럼 매번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30명 남짓한 학급에서 여학생을 포함하여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글씨를 잘 썼던 새원이는 지문을 읽고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에는 관련된 단어 몇 개만 겨우 적어놓거나, 아예 아무 말도 쓰지 못했다. 그나마 겨우 써놓은 단어들도 지문을 보고 썼음에도 틀리게 쓴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수업 시간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반듯하게 앉아 나의 설명에 열중했던 새원이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던져지면 망설임 없이 첫 번째로 손을 들었고, 아나 모르나 맞으나 틀리나 일단 일어나서 웅얼거리듯 몇 마디라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새원이가 예쁘게 쓴 숫자들 위로 빨간 비가 세차게 내렸던 수학 시간에도 그 녀석은 늘 반전 매력을 보여주었다. 항상 거의 다 틀렸지만 새원이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게 참 기특하고 신기했다.

이렇게 못하는데도 지치지 않는 한결같은 성실함이라니.’

나는 새원이의 의욕과 꾸준함이 참 좋았다. 이렇게 욕심 많고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새원이는 왜 공부를 못하는 걸까?  

  

일단 새원이는 단기기억력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부족했다. 수학을 처음 배운 시간에는 설명과 내용을 이해하여 곧잘 풀었다. 수학책의 예시 문제와 수학 익힘책의 1,2번(원리를 바탕으로 한 쉬운 문제)까지는 곧잘 풀었다. 문제는 그 다음 시간이었다.

새원이는 전 시간에 배운 내용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왔다. 어쩜 이렇게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까, 야속할 정도로 하얗게 잊어버리고 왔다. 그 시간에 배워야 할 내용은 또 따로 있었기에 새원이 하나를 위해 이전 차시 내용을 차근히 설명해줄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새원이의 학습 결손은 누적되어갔다. 구구단을 겨우 외웠던 것으로 보아 2학년 정도까지만 제대로 학습된 듯 했다. 그나마 새원이는 공부를 잘 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기 때문에 각 학년에서 배웠던 내용 중 매우 쉽거나 계열성이 적은 것들은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었고, 그 덕에 겨우 학습 부진 판정을 받지 않고 진급해온 것이었다. 새원이의 반듯하고 예쁜 글씨체는 그런 필사적 노력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수확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새원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따로 공부를 시켜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하지 못했다.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이른바 ‘나머지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날 학습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주어진 시간 안에 수학 익힘을 다 풀지 못한 날은 쉬는 시간, 점심 시간부터 나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 풀고 가게 했다. 하지만 새원이는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꾸준한 도움이 필요한 아이였다.




학년부장이라 바빴던 담임 교사인 나와 인내심을 갖고 새원이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의 친구들이 항상 시간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매일매일 전체 업무 회의와 그 회의에서 나온 안건을 처리하기 위한 동학년 회의, 이 모든 회의의 결과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오후 4시30분 정시 퇴근이 어려웠다. 공부를 잘하는 다른 친구들은 당연히 방과후, 제 나름의 일정들이 다 있었다. 학교에는 이 정도 수준의 ‘진행 되어가는 부진 학생’ 지도를 위한 예산이 없었고, 당연히 별도의 학습 지도 인력을 고용할 수도 없었다.


새원이 역시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 속에서 헤벌쭉 웃으며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것도 하루 이틀, 당연히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 메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해가 질 때까지, 지역아동센터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집에 갈 때까지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큰,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새원이가 돌아간 집에는 수학 공부를 살펴주기는커녕, 같은 시간, 식당에서 일을 하느라 때에 맞춰 저녁밥 차려주기도 어려운 엄마가 아직 퇴근 않아 안계셨다. 새원이는 형들과 함께 라면을 끓여먹거나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사 먹고는 놀다 잠들었다.       


구구단을 겨우 외우는 아이에게 약분과 통분을 읊어주고, 이를 바탕으로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가르친 것인지, 보여준 것인지 알 수 없는 1년의 시간이 지나고 이듬해 2월이 되었을 때, 나는 내 눈 앞에서 또 한 명의 학습더딤아가 생겨남을 지켜봐왔단 사실에 따끔따끔 마음이 아팠다.


‘새원이에게 공부를 더 많이 시켰어야 해.’

나는 더 많은 시험지를 풀리지 않았음에 자책과 후회와 미안함으로 가슴을 쳤다.    

그러다 문득, 전년도를 떠올렸다. 수업혁신학년을 하지 않았던 2015학년에도 나는 5학년을 가르쳤었고, 그 때 동학년을 했던 후배 선생님과 함께 2016학년도에 5학년을 중임하며 수업혁신학년을 시작했던 터였다.

‘작년처럼 교과서 위주로 진도에 맞춰 수업하고, 중간‧기말고사 착실히 봤다면 새원이가 학습더딤아가 되지 않았을까?’

스스로 던진 물음에 나는 어렵지 않게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대답은 ‘절대로 아니다’였다. 어떤 교육과정이었어도, 어떻게 가르쳤어도 새원이가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5학년 수준에서 학습더딤아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학교와 교사, 교육과정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여기엔 너무도 많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생물학적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언젠가 5학년을 연이어 함께 한 후배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 선생님, 올해는 작년과 교육과정이 확연히 다른데, 올해 아이들이 작년에 비해 공부를 못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작년에는 학년 차원의 중간, 기말고사가 있었는데 올해는 각 반에서 자율적으로 시험을 봤으니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비교는 어렵고, 우리처럼 2년 연속 가르친 사람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아니,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음…… 큰 차이 없어요. 사실 작년 아이들에게 풀렸던 시험지나 학습지 올해도 비슷하게 썼었는데 아이들 점수대도 그렇고, 그 점수를 받은 학생 수도 그렇고 작년과 비슷한 것 같아요. 잘 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쳐도 잘 하고, 못 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쳐도 어려워하더라구요. 선생님은요?”

“사실 내 생각도 그래요. 혁신교육과정을 운영하면 다들 학력이 무너지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결과가 비슷하다면 차라리 그 과정은 올해처럼 놀고 체험하고 이야기하며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공부가 덜 고통스럽고 사는 게 즐겁기라도 하게. 애들은 하루의 거의 1/3을 학교에서 보내잖아요. 아, 우리의 이런 ‘느낌’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학술적인 연구 결과가 있어야겠죠?”   

 



어쩌면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는 위로로 애써 나를 달래며, 새원이가 마지막으로 5학년을 돌아보며 쓴 자기 평가서를 읽었다. 담임 교사인 나에게 쓴 것과 보호자인 부모님께 쓴 것, 2편 모두에 큼지막하게

저는 올해 성적이 올랐습니다. 제가 공부를 열심히 잘 했습니다.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써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실제로 5학년을 마치는 새원이의 표정은 자신감과 만족으로 싱글벙글이었다.

‘뭘까? 이 서로 다른 생각의 원인은?’   

 

로운 학년이 시작되고도 몇 달이 지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새원이가 말한 ‘성적이 올랐다’와 ‘공부를 잘 했다’의 의미를. 시험지는 거의 없고 활동지와 학습지가 대부분인 우리 반 아이들 포트폴리오 속에서, 그나마 있는 시험지도 배점 표시 없이 9문제, 11문제, 13문제, 17문제, 23문제, 29문제라 100점 만점의 점수로 환산하기도 어려운데 새원이는 대체 뭘 보고 자신이 성적이 올랐고, 5학년 때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한 걸까?


바로 수업 내용과 활동 과정 자체가 그대로 담긴 활동지와 학습지, 그 안에 한가득 한 별(★)표시와, 커다란 동그라미, 칭찬과 격려의 문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업 시간마다 들었던 칭찬들.


수업 시간에 연필만 써야 하느냐, 샤프도 쓸 수 있느냐, 학급 규칙을 바꿀 수도 있는  찬반이 팽팽한 토론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소신 발언을 한 후,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받았던 순간. 무더운 여름날 노끈까지 동원해 구구단을 되뇌며 야생화 모종을 열맞춰 심고는 과학 시간에 배운 뿌리‧줄기‧잎‧꽃을 이젠 정말 확실히 알겠다고 내 옆에 와 조용히 속삭여 어깨를 토닥여줬던 순간. 교실 야영 때 친구들과 함께 핸드폰 계산기와 통신사 멤버쉽 포인트까지 동원해 예산 안에서 어렵게 장을 보고, 서툰 칼질과 요리, 상차림으로 저녁상을 차려내고는 엄마 생각에 눈물 지으며 앞으로는 짜증내며 엄마 기다리지만 않고 직접 밥을 해먹겠다고, 엄마도 돈없고 피곤하고 힘들었을 거라고 말해 머리를 쓸어주었던 순간. 신분제 놀이에서 왕으로 뽑힌(=제비뽑기) 후, 여린 마음에 친한 친구들과 요구하는 모든 친구들에게 금화를 편파적으로 나눠주어 결국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는 낮은 목소리로 ‘왕은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공평하게 투표로 잘 뽑는 게 좋겠다’고 말해 친구들의 근엄한 박수를 받았던 순간. 서울 발레시어터 단원들과 체육관 무대에서 발레 동작을 멋지게 해내 5학년 친구들 모두의 박수를 받았던 순간 등등 셀 수도 없이 많다. 나도 이렇게 생생히 기억하는데 새원이 본인이 기억 못할 리 없다.    


새원이가 말한 ‘성적이 올랐다’와 ‘공부를 잘 했다’의 의미는 바로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 친구들의 환호와 박수였다. 수업 시간에, 학교에서 내가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긍정적 지지를 받는 순간의 감동

‘나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야.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자신감을 주었던 것이다.   

  

설령 이게 몇 년 안에 끝날 슬픈 착각일지래도, 오래 가지 못할 위약 효과일지래도 나는 믿는다. 이 자신감과 행복한 추억이 새원이가 살아가며 마주할 지난한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구름판이 되어주고, 무수히 마주칠 난관을 헤쳐나갈 힘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최근 혁신학교와 관련하여 팽팽한 의견 대립을 넘어선 비판적 여론이 연일 뉴스화 되고 있다. 수많은 쟁점들과 그에 따른 상반된 의견에 교사로서 양쪽 모두에 동의하고 공감하고 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보여주는 상위 0.1%의 입시 전쟁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생각하고, 그들 입장에선 그럴 수 있다 끄덕이고 있다.

나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하여, ‘출근하면 교사가 되고, 퇴근하면 학부모가 되는’ 일관성 없는 사람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매일 출근하는 학교와 교실에서 만나는 나의 아이들을 위해, 전국적으로 0.1%가 아니라 최소 10%는 훌쩍 넘을 ‘어떤 특별한’ 아이들을 위해, 이런 움직임도 있어야 한다고 읊조리며 ‘혁신교육’에 조용히 손을 들어주고 싶다.

혁신학교와 관련된 많은 논란들은 ‘혁신 교육 일반화’의 진통이 아니라 오랜 시간 우리 사회와 교육을 아프게 했던 상위 0.1%와 ‘어떤 특별한’ 계층 간의 괴리를 메워가고, 접점을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학교는 어떻게든 잘 해보고자 노력하는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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