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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꽃쌤 Apr 15. 2019

우리 마을의 중심지, 나만의 중심지

내 안의 자기 중심성에 대하여

2017년 3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일이다.


2학년에서 이제 막 올라와 통합교과 봄, 여름, 가을, 겨울(예전의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을 떼고 태어나 처음으로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체육, 도덕, 영어를 배우게 된 아이들은 새 교과서를 받아들고 설레고 기뻐하다가도 이내 공부의 어려움에 시들어 버렸다.


특히 사회는 추상적 개념을 배우는 과목인지라 눈에 보이는 과학에 비해 아이들이 많이 어려워하고 힘들어한다.


작년부터 3,4학년군 교육과정이 바뀌어 내가 3학년 담임했던 때와 현재 교과서의 내용과 구성이 서로 다른데 이전 교육과정에서 3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는 크게 지도에 대해 배우고, 우리 마을에 대해 배운 후, 옛날과 오늘날의 변화에 대해 배우는 흐름으로 짜여져 있었다.

날이 슬슬 더워지는 5월 중순, 그림지도를 힘겹게 마무리하고 우리 마을에 대해 배우던 우리반 아이들과 '우리 마을의 중심지 알아보기' 활동을 하러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돌아본 후 '우리 마을의 중심지 그림지도'를 그리는 활동까지 계획을 세웠다.


날이 더운데 3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어찌 데리고 돌아다니느냐, 굳이 안봐도 충분히 그릴 수 있지 않느냐, 은근히 별 거 없으니 꼭 나갈 필요 없지 않느냐, 등 동학년 선생님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전년도에 통학길 지도를 그려보라고 했더니

"매일 다니는 길이긴 한데 생각이 잘 안나요."

라고 말했던 5학년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다같이 나가서 직접 보면 또 다를 거예요."

라고 말하며 우리 반만 중심지 탐사(?)를 다녀오기로 했다.




탐사 당일, 날이 더우니 1교시에 바로 출발하고, 그림 지도는 돌아와서 교실에서 그리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더웠다.

이게 뭐라고, 겨우 동네 한바퀴 돌고 오는 건데 아이들은 굉장히 설렌 표정이었다.

"너무 좋아서 긴장이 되요."

썬캡을 고쳐 쓰고 운동화를 단단히 조이는 아이들의 온 몸엔 신남과 기쁨이 통통통 튀어나오고 있었다.

학교를 출발해 동산 우체국까지 갔다 다시 반대편 길을 통해 학교로 되돌아오는 코스. 우리 마을의 중심지를 어디로 잡아볼까, 아이들과 상의해보니 단연 저 길이란다.

"동산동의 메인 스트리트죠."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 같은 표현은 어디서 배웠는지, 저런 단어는 잘도 기억하면서 왜 내가 가르쳐주는 건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지 살짝 서운하기도 했다.


"잠시 후 교실에 돌아가서 지금 본 것들을 그림으로 나타낼 거니까 잘 보고, 잘 기억해야해요."

친구 선생님에게서 빌려온 미니 확성기로 신신당부를 하며 긴 줄을 이끌고 학교를 출발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희 사회 공부하러 나왔어요."

"안녕, 얘들아! 인사를 참 잘 하는구나."

"선생님이 인사 잘하래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상해, 중심지인데 사람이 없어. 다 어디 갔지?선생님이 알려준 거랑 다른데."

"아직 출근 안한 거 아닐까요?"

"지금 9시가 넘었는데 어떻게 출근을 안해요?"

"10시는 되야 문 열어, 얘들아!"


아이들은 오고가는 행인과 이제 막 가게 문을 열기 시작한 상인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자기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면서 나를 따라 줄지어 걸었다.


"여러분, 지금 집중해서 잘 보고 있는 거 맞지요?"

"네~"

이견이 없는 단합된 한 소리.
"아, 선생님은 또 여러분들이 장난치고 있는 줄 알았네요."
일단 믿어보기로 한다.


더워서 정신이 없는 통에 이 거국적 활동에 기념사진 하나가 없다. 하여 첨부할 사진이 더는 없다.


"여러분 잘 보고 왔지요?그럼 우리가 조금전 우리 마을의 중심지에서 뭘 보았는지 함께 이야기해볼까요? 일단 선생님은..."

나는 칠판에 미리 그려놓은 백지도 위에 크게 파리바게뜨, 뚜레주르, 효정내과, 원광한의원, 대원 인쇄소, 조촌농약사, 새마을금고, 최창익 이비인후과, 맘스터치 등을 썼다.

솔직히 교실에서 갑자기 쓰기 시작했다면 제본이나 학습준비물 구입을 위해 종종 가는 곳이지만 대원인쇄소, 조촌농약사는 쓰지 못 했을 것이다.

'역시 직접 나가보길 잘 했어. 애들도 비슷한 마음이겠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괜한 보람과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그 길에 효정내과가 있어요? 우리 동네엔 한신내과만 있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대~박! 어떻게 파리바게뜨 옆에 뚜레주르가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선생님, 잘못 그리신 거 아니에요?"

"우리 동네에 조촌농약사가 있어요?선생님, 우리 농촌이에요? 도시 아니었어요?"

갑자기 온 교실에 나에 대한 불신이 한가득 피어올랐다.


"아니 여러분, 선생님은 태어나서 동산동을 3주 이상 떠나본 적이 없어요. 선생님이 지금 거짓말을 하거나 뭘 잘못 말하고 있겠어요?"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명대사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를 울부짖어야 했을 상황. 하지만 아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조금 전에 자신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왔다 이거다.

"여러분, 선생님도 봤어요. 우리 아까 같이 나갔다 왔잖아요."


한참의 실갱이 끝에 일단 그냥 넘어가고, 아이들이 각자의 활동지에 자신이 본 것을 그려 그림 지도를 완성하기로 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다시 일어났다.


"우리 마을에 동물병원이 있어요?진짜?여기에 이지 수학영어 학원이 있다고?진짜?정말?"
나는 눈을 비비며 아이들의 활동지를 다시 봤다.

"야, 여기에 지앤비 어학원이 있다고?가정의학과? 우리 마을에 내과 말고 가정의학과도 있니?진짜야?"

너무 흥분한 나는 서로모두에게 높임말 하기로 했던 학급 약속도 잊은채 아이들에게 반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 이쯤해서 토스트집은 있는 것 같아. 선생님도 그거 본 거 같아. 예전에 먹어본 거 같아. 뭐?여기에 정말 학원이 있다고?몇층에?2층에?진짜?얘들아, 아니라니까. 그리고 여기에는 진짜로 새마을금고가 있어. 진짜야  믿어줘 좀!"


결국 우리 모두가 존재여부와 위치에서 만장일치를 본 것은 '맘스터치' 하나였다. 맘스터치 만큼은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자, 여러분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내가 오늘 그린 그림지도가 맞는지 잘 확인해보세요. 선생님도 오늘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잘 볼게요."  

아이들은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퇴근길, 학교를 나서며 눈을 더 크게 뜨고 두리번거렸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말했다.
"선생님 진짜 파리바게뜨 옆에 뚜레주르가 있었어요. 아, 신기하고 말이 안되요. 왜 빵집 2개가 같이 있지? 장사 안되게?"

"선생님, 한신내과, 효정내과, 이상영 가정의학과 모두 다 있었어요."

"선생님, 농약사도 이름이 조촌이고, 새마을금고도 이름이 조촌이에요. 우리 학교 이름도 조촌인데."

"여러분들이 말한 학원 다 있더라구요. 진짜 2층에 어학원이 있더라. 거기 쓴 사람들은 거기 다니는 거지?"

"네~"

"우리 아가씨는 개나 고양이 키워요?"

"아니오."

"그런데 거기에 푸른 동물 병원이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강아지 너무 갖고 싶어서 거기서 만날 구경해요. 아픈 강아지들 너무 많아요. 불쌍해요."

"선생님도 선생님이 쓴 데 다녀요. 효정내과 다니고, 최창익 이비인후과 다녀요. 새마을금고 가서 저축하고, 조촌농약사 가서 저 토마토 모종 사왔어요."

"우리 모두 다같이 다니는 곳은 맘스터치인가봐요. 선생님!"

"그런가봐요. 감자튀김은 맘스터치가 맛있지!"



시간이 흘러도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똑같은 걸 동시에 함께 보고도 각자 다른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을 한 우리의 '자기 중심성'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고,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내 기억만 주장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억한 것은 그럴리 없다, 아니다, 라고 우기기까지 했다.

'일심상회' '우성 조명 전기' '동산 달 주얼리' '서울 옷수선'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을 중요한 정보로 인식하여 가치를 부여한 사람이 우리 중 단 한사람도 없었단 뜻일 거다.


웃어 넘길 수도 있는 재미난 일이지만 이 일은 한번씩 내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나는 내 안의 자기중심성으로 아이들을 잘못 혼내거나 잘못 칭찬한 적 없는지, 그로 인해 상처받은 아이가 없는지 때때로 간담이 서늘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선생님도 인간인지라 그런 실수를 하였다고, 이해해주길 바라고 용서를 구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몇 마디 말로 그 상처가 쉬 아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또, 이렇게 타인에게 상처 줄 것을 너무 두려워하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일상과 삶 속에서 문득문득 숙연한 깨달음의 순간들이 있는데 이 중심지 알아보기 활동도 그 중 하나였다.


모쪼록 더욱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머리와 온정적이고 일관된 마음을 가꿔야겠다, 다짐하는 교훈적인 일요일 밤이다.


다같이 나가서 직접 보길 잘했다.

다르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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