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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굼바 Dec 24. 2021

<전락>과 <지하로부터의 수기>

알베르 카뮈 <전락>,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대해






 나는 객관적인 글을 좋아한다. 드뷔시 곡을 즐겨 듣는 입장에서 객관적인 글을 좋아한다는 게 우스꽝스럽지만 최근 카뮈의 <전락>과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 바로 그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두 책 다 한 등장인물의 모놀로그(독백)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작품이다. 물론 <전락> 같은 경우엔 주인공 '클라망스'가 불특정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예 지하실에 처박혀 혼잣말 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더 일찍 쓰여졌기 때문에 나는 <전락>의 뒷부분 해설에선 장 블로크 미셸이 <전락>은 도스토옙스키의 그 진솔한 지하 인간 수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전락>을 읽으면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부류는 아니라고 생각은 했는데, 막상 <전락>을 다 읽고 나서 수기를 읽으니 그저 자기고백적 성격과 형식만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오히려 카뮈의 글보다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붙여놓아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락> 속 '클라망스'는 프랑스에서 변호사로 일했던 과거를 시작으로 암스테르담에 머물러 있는 현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의 자신은 예의 바르고 남 돕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 미덕에 흠뻑 취해 있었다고 밝힌다. 또한 여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쾌락을 자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잘나가던 자신이 나중에 와서 깨달은 것은 '오만함'이었던 것이다. 사회의 도덕을 실천하며 가졌던 자기 만족감은 단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지 결코 목적 없는 선함이 아니었다. 클라망스는 자기 내면 속의 아이러니와 본성을 오래 연구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가 과거 해왔던 행동, 즉 겸손은 남의 이목을 끄는 데 도움이 되고, 겸양은 남을 이기는 데, 그리고 덕성은 남을 억압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했다고 말하고 이해관계를 떠난 수단으로 탐하던 모든 것을 얻어냈다고 고백한다. 덧붙여 클라망스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본성의 바탕으로부터 우러나듯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점점 인간의 진실성에 대해 파헤치고 이해하던 그는 흐르고 흘러 현재 암스테르담에 있는 것인데, 읽다 보면 한 번쯤은 궁금할 '왜 이 이야기를 할까?'의 대답은 바로 현재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진솔한 고백'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여태껏 메소드 연기로 연극을 하고 있었으며 그걸 우리는 맨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기실 줄거리라고 할 것도 없는 짧은 소설인데, 클라망스가 인간의 무언가를 얘기할 때마다 너무 흥미로웠다. 그의 아주 작은 경험이 소우주가 되어 범인류적인 이야기로 진화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범인류적 이야기라는 게 일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던 것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거라 또 한번 카뮈를 입에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에게 위로받을 때, 우리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따뜻한 동정을 얻으려고 하지 결코 윗사람에게 충고를 들으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스스로 무고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살아가기 때문에 누군가의 심판이 개입될 시 자존심 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천성적으로 에고이즘에 푹 담겨 남을 심판하는 것은 잘하고 또 즐긴다. 그래서 작중 클라망스는 자기를 '재판관' 겸 '참회자'라고 칭하는데, 이 '재판관'은 남에 대해 심판하고 얘기하는 직종이고 '참회자'는 말 그대로 자신의 내면을 참회하는 사람이다. 비록 클라망스는 두 가지 위치에 놓여 있지만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회를 할까. 말로는 했던 일 되돌아보며 성찰하고 참회했다 하겠지만 여기서 클라망스의 참회는 그것 이상의 가치와 고역을 지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참회는 자기 자신을 짓밟고 부수는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대개 '자존감이 낮다'고들 하지만, 클라망스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아가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자길 비하하는 것이지 결코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의 의도가 결국 듣는 이의 고백을, 그러니까 '참회'를 끌어내기 위함이란 걸 알았을 때 왜 카뮈가 여기서 듣는 이를 굳이 정해놓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읽으독자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

 내가 <전락>과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다르다고 느낀 게 바로 '객관성' 때문인데, 카뮈는 클라망스의 입을 통해 우리의 진실된 삶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예 목적으로 잡고 들어갔다면 도스토옙스키는 말하다 보니 인생은 이렇다, 라는 느낌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나는 누가 더 잘났다는 둥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된다. 단지 내 생각을 밝힐 뿐이다. 물론 그가 인생에 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든가 아예 공상에 빠져 있었다든가 한 건 아니지만, 그가 생각하는 인생의 무언가는 삶의 방향까지 생각하게 만들진 않는 것 같았다. 예컨대 카뮈의 <페스트>는 인간 내부의 페스트 병균을 말하면서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살면 좋을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체홉의 4대 희곡은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일상의 평범함, 단조로움 속에서 '어떻게'를 던지게끔 한다고 생각한다(체홉 같은 경우 해석이 매우 어렵고 다양해 감히 말을 덧붙이는 것은 삼가겠다).


 객관적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 객관성이 작가의 의도와 문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카뮈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다. 필요한 말만 있지 부수적인 형용이 많이 없다. 심지어 문장도 안 어려워서 당시 프랑스인들이 카뮈 글을 읽으면서 '이정도면 나도 작가 될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했다가 바로 포기했다고 한다. 그 점 때문에 오히려 감성적인 글보다 주제 의식이 더 뚜렷하고 여운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글이 감성적이지 않다는 것은 또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페스트> 같은 경우엔 객관적이면 객관적일수록 더욱 슬픈 이야기이다. 이상의 <날개>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덤덤하면 덤덤할수록 가슴이 아픈 문학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의 대문호라고 말 얹이는 작가들에게도 그다지 흥미가 없다. 톨스토이 시절 러시아에는 글의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을 더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하다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 2~3부작이다. 그 얘길 듣고 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멋있는 대문호의 글이 그닥 신뢰감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다.

 두 책을 읽고 난 뒤 지극히 개인적은 취향으로 얘기하는 것이지 결코 객관성을 강요하는 의도는 요만큼도 없다. 오히려 베스트셀러의 감성들이 활개치는 요즘 서점에서 딱딱하고 밋밋한 객관성은 주류가 될 수가 없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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