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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굼바 Dec 24. 2021

우리는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한적한 시골길, 나무 한 그루, 남자 두 명.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시작되는 모습들이다.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 인적 없는 길에서 만난다. 그들은 마주치자마자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것처럼 건조한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익숙하다는듯 대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몇 마디 주고받는 것도 잠시, 에스트라공은 구두가 안 벗겨진다고 투덜거리고, 블라디미르는 뜬금없이 마지막 순간이란 단어에 꽂혀 환상에 빠진다. 그러더니 갑자기 구원받은 도둑놈에 대해 이야기하고, 먼 배경을 바라보던 에스트라공이 멋진 경치라며 감탄하고는 이제 가자고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고 뭘 얘기하고 있는지 감도 안 잡히는 이 상황에서, 블라디미르는 둘의 목적을 상기한다. 고도를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에스트라공은 깜빡했다는듯 참 그렇지, 라고 맞장구 치고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들은 고도가 언제 오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나무 앞에서 기다리는 게 맞는지, 토요일에 온다고 했는데 오늘이 토요일은 맞는지, 정확한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고도를 기다려야 된다는 목적을 한번 떠올린 뒤론 또다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열한다. 갑자기 잠들어서는 악몽을 꿨다는 둥 기다리는 동안 나뭇가지에 목을 매자는 둥 하다가, 배가 고프다고 당근과 순무를 먹는다. 그리고 그때 목줄을 찬 하인 럭키와 주인 포조가 그들 앞에 등장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 엄격한 상하관계를 보고 처음엔 욕하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포조가 돈이 많은 사람이란 걸 알자 에스트라공이 뱉는 첫마디는 '5프랑만.'이다. 심지어는 포조가 먹고 버린 닭뼈까지 처리하고, 나중엔 언제 럭키를 가엽게 여겼냐는듯 포조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도중 그는 럭키가 생각을 한다며 모자를 한번 씌워 보라고 말한다. 블라디미르가 모자를 씌우자 그동안 한마디도 없던 럭키는 갑자기 엄청난 양의 말들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문맥이 단 하나도 맞지 않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천재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신기해한다. 하지만 럭키는 연설과도 같은 긴긴 독백이 끝나고는 다시 입을 꾹 다문다. 그러고 다시 제 주인의 짐을 들고 목줄을 찬 채 떠난다.
그들이 가고 저녁이 되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도 슬슬 자러 갈 준비를 한다. 고도는 결국 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도의 밑에서 일한다는 소년이 찾아와 내일은 고도 씨가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둘은 내일은 꼭 오겠지, 생각하고 이제 그만 가자고 한다. 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림은 다음날이 되어도 똑같다. 두 남자는 어제와 같은 래퍼토리로 또다시 만나고 이야기한다. 대화 중간에 이따금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고, 다시 그 목적을 흐리기를 반복한다.
 포조와 럭키가 또 한번 지나간다. 그러나 포조는 눈이 멀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포조는 앞을 못 보게 되자 어제와는 달리 인생에 대해 사뭇 진지한 말들을 늘여놓는다. 럭키는 별 다를 것 없이 하인 노릇을 한다.


 그들이 가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과연 포조가 진짜 장님인지 아닌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어느덧 저녁이 되었지만 고도는 또 오지 않았고, 소년은 내일 고도 씨가 오실 거란 말을 전한다. 그들은 기다리는 걸 더 이상 못하겠다며 내일도 오지 않으면 그냥 목을 매자고 한다. 그리고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가 1955년에 출판한 작품이다.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는 이 작품은, 과연 '고도가 누구인가?'에 관한 여러 의견들을 부딪히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베케트 자신은 '고도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책에 썼을 것'이라며 고도의 존재 정의를 뭉뚱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졌고 신, 자유, 구원, 빵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나는 고도를 신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자유 또는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존재도 신이고 이 신이 설령 인격체가 아니더라도 어떤 희망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고도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요지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태도인 것 같았다. 작가가 '고도'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제목은 달랑 '고도'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는 누군가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로, 주체는 고도가 아니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는 주체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너무나 막연한 행동을 취한다. 고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부터 시작해 언제, 어떻게 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맥락이 엉망이고 했던 말도 까먹고 반복하고의 연속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보지 못한다. 작중 블라디미르는 '넷이 다 한자리에 있었다니까.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 얘길 하고 있는데,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 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까?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잖아? 그 사람의 해석밖에 모르고 있다니까.'라는 말을 한다. 이때 도둑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라고 쳤을 때, 다른 해석은 제쳐두고 구원받는 이야기만 믿는 것은 단지 구원받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블라디미르가 그 점을 알고 구원받은 도둑 이야기를 믿지 않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자기네들도 똑같이 구원받고 싶은 마음으로 고도를 기다리면서 그런 사람들을 욕하고 있다. 즉, 제 얼굴에 침 뱉는 격다.
또한 자발적으로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면서 배고프다고 당근을 먹을 때 '고도에게 묶여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자기네들의 권리를 '헐값으로 팔아버렸다.'는 얘기도 한다. 그래도 고도를 다린다.


 포조와 럭키는 이제는 사라진 노예제도, 계급사회를 다시 연상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중간에 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줏대 없는 모습은 현실 사회의 우리들처럼 다가왔다. 몇 세기에 걸쳐 자유를 외친 결과 서로간의 계급 장벽이 허물어지고 모두가 평등해진 20세기에 굳이 노예를 등장시킨 것이 아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은연중의 계급제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밌었던 점은 럭키의 이름이었는데, 구타당하면서까지 복종하는 그 삶과 '행운'이란 의미의 이름이 아이러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보는 행복하다라는 말이 있듯 만약 럭키가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며 사는 인생을 좋다고 여긴다면, 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둘은 주체성이라곤 하나도 없이 고도에게 복종하고 기다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기다림이 언제부터 이어져 왔는지 가늠도 안 될 정도다. 작중에는 에스트라공이 럭키에게 발길질하는 장면이 꽤 있는데 그는 이때마다 찬 발을 다친다. 나는 이것이 에스트라공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차는 것과 같기 때문에, 즉 스스로를 때린 것과 매한가지여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럭키는 이름뿐 아니라 그의 대사 또한 인상깊게 느껴졌다. 긴 분량이기도 하고 럭키가 말할 때라곤 딱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말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작가 또한 휴지부라곤 하나도 없는 그 말들을 이해하라고 적어놓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정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극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갔을 것이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처럼 앞뒤가 맞지 않게, 즉 부조리하게 다가오는 것이 의도인 것 같았다.
사실 구구절절 많은 대사들을 찾아보지 않아도 갈 순 없어./왜?/고도를 기다려야지./참 그렇지.라는 짧은 대화 속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다고도 생각했다.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목적 의식과 그걸 계속 까먹고 있는 두 주인공의 래퍼토리는 아마 다음날, 그다음날, 다음달이 되어서도 변함없을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라는 특징으로 유명해진 작품이라지만 실제로 베케트는 스스로 부조리함을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신 방향성을 따지자면 이오네스코 같은 타작가들과 달리 카뮈의 부조리 이론쪽에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카뮈가 소설 <이방인> 속 뫼르소의 터무니없는 살인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부조리함과 베케트가 주인공 두 명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바와는 다르다. 카뮈는 일상 생활의 어두운 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 명시되어 있지만 우리가 얼마만큼 찾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것도 달라진다. 그러나 베케트는 극을 구성하는 배경부터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얘기하는 주제도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낯설고 익숙치 않다. 이런 직접적 표현 방식은 밑바닥에 깔아두고 알아서 건져내게 만드는 카뮈의 간접적인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조리 개념 자체도 다르게 전달하고 있다. 베케트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 현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의식의 흐름대로만 가는 막연한 사람들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고 전달하는 듯하다. 여기서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매우 간단명료하고 현실적인 카뮈와 달리 그 전달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관한 통찰과 서술은 가능하지만 그 세상을 살아갈 방법은 적어두지 않았다. 이 점에서 베케트 또한 두 주인공과 비슷하게 '막연함'을 갖고 있 수도 있다.


 또한 사실주의 극작가였던 안톤 체홉과 비교가 되기도 했다. 두 작가 모두 인간의 생을 얘기하고 있단 점에선 같지만, 체홉은 그 삶의 방식까지 얘기하는 반면 베케트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이 희곡이 노벨 문학상을 받고 공연도 수차례 되었지만, 과연 작품 속 의미를 이해하고 삶을 되돌아본 사람들은 몇이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하지만 삶 자체가 불행이고, 부조리하게 흘러간다는 베케트의 메시지는 설령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와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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