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찾지 않는 방에서
요양원의 저녁 시간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듭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저녁 햇살이 길게 늘어선 복도 바닥에 장미색 그림자를 드리우고, 벽에 걸린 오래된 시계는 여전히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시계의 바늘은 이미 오래전에 멈췄지만, 이곳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TV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쇠 바퀴 구르는 소리만이 이 고요함을 깨뜨립니다. 휠체어를 탄 노인들이 한두 명씩 TV 앞에 모여있고, 몇몇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봅니다. 시선을 따라가 보면 작은 정원에 심어진 매화나무가 있습니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하얀 꽃을 피울 것입니다.
간병인들은 저녁 식사 준비로 분주합니다. 쟁반에 담긴 약과 물컵, 부드러운 죽과 반찬들이 차례로 나옵니다. 일부 노인들은 식당으로 모이지만, 대부분은 각자의 방에서 식사를 합니다. 요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노인들의 체취, 그리고 따뜻한 저녁 식사 냄새가 뒤섞여 묘한 공기를 만들어냅니다.
벽면에는 계절을 알리는 종이 장식들이 붙어 있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붙인 종이 매화와 개나리가 가끔 에어컨 바람에 살랑거립니다. 그 아래로 노인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가 붙어 있어, 이곳이 누군가의 마지막 보금자리임을 상기시킵니다.
문득 복도 끝에서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 옛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가 보면, 창가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는 한 노인이 있습니다.
노인1
나이: 104세
가족관계: 무
결혼: 미혼
특이사항: 기분이 아주 좋을 때 흥얼거림.
노인은 하루종일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나 간식을 먹을 때나 그렇습니다. 그런 노인이 가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창가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 듯이~~~~~~~"
그녀의 주름진, 하지만 여전히 단정한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집니다. 104년의 세월이 쌓인 그 얼굴에서 문득 젊은 날의 그녀가 보입니다. 연분홍 치마를 입고 봄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웃고 있는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간병인이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건넵니다.
"어르신,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봐요."
노인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계속해서 노래를 이어갑니다.
"오늘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간병인은 가만히 노인을 바라봅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지만, 노래의 가락은 또렷합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불러온 노래처럼 익숙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담긴 노래일지도 모릅니다.
간병인의 마음속에 작은 상념이 흐릅니다. '오늘도 내일도 장담할 수 없는 시간들... 나의 오늘을, 나의 내일을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녀는 교회의 권사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입원 초기에는 교회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들이 많이 다녀가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오고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노인에게는 부양의무자도 없습니다.
104년을 살아온 그녀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열정적으로 교회 일을 했고, 결혼도 하지 않고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봉사했던 그녀. 어쩌면 봄날에 만난 연인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를 했던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국가의 지원에 의지한 채 마지막을 걷고 있습니다. 방 안에는 그녀의 인생을 증명할 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작은 사진 한 장, 낡은 성경책 한 권... 104년의 삶이 이렇게 작은 공간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 애잔합니다.
창가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멈춥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집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는 그대로 봄날의 추억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노인2
나이: 98세
가족관계: 아들1 딸3
남편: 일찍 사별
특이사항: 하루종일 말이 없고 자꾸만 휠체어에서 내려오시려고 시도를 하심
복도 반대편에는 또 다른 노인이 있습니다. 98세의 이 노인은 휠체어에 앉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휠체어에서 나오려고 시도를 계속해서 하고, 휠체어 앞 거치대를 손바닥으로 치고 있습니다.
간병인이 다가가 말합니다. "어르신, 이제 그만하세요. 손바닥 아프지 않으세요?"
노인은 말 대신 사슴 같은 눈으로 간병인을 바라보며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합니다. 그 눈빛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어딘가로 가고 싶은,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어르신, 안돼요. 조금만 이렇게 계세요."
간병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휠체어 앞 거치대는 이미 반쯤 열려 있습니다. 노인의 끈질긴 시도로 조금씩 열린 것입니다. 그녀는 어딘가로 가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 노인은 아직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이유는 침대에 누우면 바로 밖으로 기어서 나오시며 온 동네에 대변으로 그림을 그려 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노인에게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자신의 행위를 알지 못하는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을...
이 노인에게도 분명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자녀들을 키웠을 그녀의 인생. 어쩌면 그녀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곳은 옛날에 살던 집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돌아가신 남편이 묻힌 곳일지도 모릅니다. 치매가 그녀의 기억을 조각내고,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 놓았지만,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돌아가고 싶은 장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들 하나와 딸 셋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방문은 드뭅니다. 각자의 삶에 바쁜 것일까요, 아니면 더 이상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픈 것일까요?
노인의 손바닥은 휠체어 거치대를 치느라 빨갛게 부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감옥에 갇힌 새가 자유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인생의 봄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봄날은 간다"는 노래처럼,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꽃피는 봄날이 있고, 그 봄날은 어느새 지나갑니다. 104세 노인의 봄날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그 순간이 살아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내가 선택해서, 때로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무언가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양원의 두 노인처럼,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노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까요? 어떤 장소를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곁에는 누가 있을까요?
하루 빨리 치매를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는 약이 세상에 나오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노후가 어릴 적 물레방아 도는 마을 뒷간에서 술래잡기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예쁜 수채화 한 장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봄날은 갑니다. 그리고 또 다른 봄날이 옵니다. 노인들의 방에도 다시 봄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그 봄을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은 그들의 얼굴을 쓰다듬어 줄 것입니다.
요양원의 밤이 깊어갑니다. 104세 노인은 이제 침대에 누워 조용히 숨을 쉬고 있고, 98세 노인은 마지막까지 휠체어 거치대와 씨름하다 결국 간병인의 도움으로 침대에 눕습니다. 두 노인의 방 사이에 있는 창문으로 달빛이 스며듭니다. 그 달빛 아래서 백설희의 노래 가사가 마음에 울립니다.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이제는 별이 떠도 함께 웃을 이 없고, 별이 져도 함께 울 이 없는 그들의 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봄날의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이자 슬픔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