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유산을 설계하다
창밖의 풍경은 계절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흐르는데, 내 마음의 시계추는 자꾸만 거꾸로 돌아가 멈춰 선다. 14권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고, 수만 개의 문장을 길어 올리며 삶의 베테랑이 된 듯 착각하며 살았지만, 실상은 여전히 매일 아침 '생(生)이라는 거대한 학교'의 정문을 들어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 익숙해질 법도 한 삶인데, 생은 매번 예고도 없이 빳빳하고 생경한 새 교과서를 내민다. 나는 그 막막한 백지 앞에서 '기역'과 '니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게 연필을 쥐어본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무색하게도, 삶의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일은 언제나 처음처럼 위태롭고 낯설다.
오늘도 그랬다. 산적한 일들을 파도처럼 넘어서고, 문장들 사이를 물고기처럼 분주하게 유영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전원이 나간 낡은 전구처럼, 내 안의 의욕이 '탁' 소리를 내며 점멸했다. 방금까지 뜨겁게 달궈졌던 마음이 찰나의 정적 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과정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그 정막을 깨고 발등 위로 툭, 무거운 질문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스스로를 소진하며 쓰고 있는가?’
이 질문은 너무도 거대하고 육중하여, 한 번 발등을 짓눌리면 다시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내가 써온 문장들이 과연 누군가의 삶에 작은 파동이라도 일으켰을까, 아니면 그저 허공으로 흩어지는 비명에 불과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앞에서 나는 교실 구석에 앉아 벌을 서는 아이처럼 작아진다.
하지만 이 '의욕의 점멸'은 어쩌면 내 영혼이 내지르는 비명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라는 우주적인 배려일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달려온 작가의 시계를 멈추고, 다시 초심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나는 발등을 짓누르는 질문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다시 연필 끝을 다듬는다. 비록 서툴고 느리지만, 이 낯선 교과서의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 '서툰 쓰기'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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