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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바다 Aug 23. 2022

팀 켈러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

"현대 세속주의를 의심하다"

 필자는 무신론자이지만 평소에 타종교에 관심이 많다. 종교란 신을 믿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신을 믿지 않고 특정한 종교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보고 세속주의자라고 한다. 세속주의는 종교에 대한 반향으로 나왔다고 한다. 즉, 종교가 선행되었으나 종교에 대한 회의나 불신 등으로 종교에서 떠난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자연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지면서 종교에서의 이탈은 증가하고 있다.


 보통 어떤 국가가 자연상태에서 과학 기술이 진보된 나라일수록 세속화된 국가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세속화되었다고 더 진보된 국가인 것은 아니다. 가령 미국은 과학 기술이 고도로 진보된 나라지만, 종교를 믿는 자는 60%가 훌쩍 넘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마다 종교인의 숫자는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팀 켈러도 이 지점을 말하고 있다. 종교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 또, 종교는 과연 과학 기술의 진보로 인해 없어질 것인가?


 팀 켈러는 종교가 무신론보다 "사실"과 "존재"를 더욱 잘 기술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종교를 믿는 것이 현대의 세속주의를 따르는 것보다 이익이 많다고 한다. 인간이 그의 본성을 따를 때 부정적인 것들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데, 종교가 이 부정적인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세속주의는 그러하지 못하다. 따라서 현실을 잘 반영하고 그에 따른 해결 방법을 알려주므로 종교는 우리에게 필요하며, 또한 이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가 무신론보다 "사실"과 "존재"를 더욱 잘 기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신학이 주장하는 "사실"과 "존재"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 하므로, 지금 여기서는 두 번째 주장인 종교를 믿는 것이 현대의 세속주의를 따르는 것보다 이익이 많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겠다.





- 인간 본성에 따른 모순과 그에 따른 기독교의 해결책 제시


 저자는 세속의 뜻을 크게 3가지로 정의한다. 정교분리라는 뜻에서의 세속사회와,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세속, 또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의 세속이다. 팀 켈러는 그 중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의 세속 또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의 세속을 가리켜 날카롭게 비판한다.


 세속주의의 자유는 구속돼 있는 자유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특정한 상황에 제한된다. 가령 나는 경제적 빈곤으로 내 자유에 관한 제약 속에서 산다. 혹은 성판매자는 자신이 처한 처지에 따라 '그만의' 자유로 성을 판매한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애초에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생각을 바라지 않으며 그렇게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즉, 스스로 세속적 자유를 바라지 않는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속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목표에 골칫거리인 욕망이 들어찰 틈이 없다. 세속주의자와는 다른 목적의 욕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와 다른 욕구가 적대적인 상태에 놓여있지 않다. 그들에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나 부도덕함을 행하고 싶은 욕망은 내 목표의 골칫거리가 아닌, 당연히 거치는 시련이다. 시련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을 주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세속주의자는 그 죄나 부도덕함을 행함으로써 또는 이를 욕망함으로써 자기 모순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죄와 부도덕함은 어찌되었건 옳지 못한 것으로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속주의 속 "자유"에 따르면 사랑은 "내"가 상대방을 사랑을 사랑하므로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이 "나"보다 우선할 수 없다. 과거에 어떤 종교인이 무신론자을 “나”신교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무신론자에겐 모든 가치판단과 신념은 "나"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랑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관계에서 상대방은 그 가치판단과 신념에 이용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이에게 헌신적인 이유는 내 마음이 하라고 하여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 자체의 목적인 아닌 내 마음에 평안을 얻으려는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랑은 쌍방의 관계인데, 세속주의 속 "자유"는 그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든다. 이렇게 끝없이 욕망하는 것 외에 타인을 수단으로써 보는 태도와 소유하려하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사랑에 초연해지는 것이다. 초연하다면 사랑이라는 욕구를 크게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그러하지 않다고 한다. 사랑을 향한 욕망과 사랑 받음에 대한 욕구, 그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 하나님께 배운 사랑은 항상 온전한데, 각각의 개인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의 뜻에 따라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에게 사랑이란 무조건적 배려, 헌신, 희생이다. 만약 타인에게 배척당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배척을 받은 것이지 하나님께 배척 받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에 따른 사랑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알아낸다. 그러고는 전력을 다해 그대로 말하고 행동해서 상대를 기쁘게 한다. ...... 당신이 바라는 것은 오직 상대의 사랑과 기쁨이다.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리와 하나님의 궁극적 관계가 바로 그렇다. _163.p



우리나라에서는 퀴어 축제가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한다. 퀴어 축제가 혐오감을 준다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체로 활보하는 사람들도 혐오감을 준다. 혐오감은 곧 ‘해악’을 의미하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유주의/개인주의인 나라에서 자유의 한계는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해악’주는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악’이라는 기준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란 힘들다. 퀴어 축제는 우리나라에서 보호 받는다. 반대로 최근 오토바이를 타고 나체로 활보하는 사람에 대해 경범죄 처벌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팀 켈러는 세속주의는 특정 ‘선’이나 ‘도덕’을 따르라고 하지 않으므로 세속주의 논리상 자유주의적 ‘해악’을 정의할 수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해악’을 정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특정 가치를 기반으로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자유주의나 개인주의만으로 정의 내린 것이 아닌, 특정한 믿음을 토대로 내려진 판단이라고 한다.

특히 인권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세속주의 안에서 답할 수는 없다. 인권은 보편적으로 ‘발견’되었다고 인정되는 만큼 그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세속주의는 인권의 발견을 증명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이를 발명하였더라도 그 권위는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세속주의에 따른다면 인권보다 자유가 우선시 되므로 개개인은 이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을 믿기 위해서는 존재가 증명되든지, 혹은 인간 바깥에서 더 큰 권위를 부여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시대의 세속적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 빠진다. 남의 도덕은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우기면서 마치 자신의 도덕만은 그렇지 않다는 듯 남을 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론상으로는 상대주의자이지만, 이견을 품은 사람들과 실제로 교류하는 방식을 보면 절대주의자다.” _258.p




 처음은 굉장히 비판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평소에 궁금하였으나 잘 이야기 하지 않는 부분을 속시원히 이야기한 것이 좋았다. 나 또한 이런 문제로 끝없이 고민하고 있다. 나는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서의 '나'라는 개념과 '자유'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 사조들은 특정 방향을 가리키는 '도덕'이나 '선(善)'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기부나 봉사를 장려한다. 하지만 이는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서는 이끌어낼 수 없는 결론이며, 이에 반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따르는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그러므로 기부나 봉사는 장려의 선에서 멈춘다. 왜 기부나 봉사가 장려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왜 기부나 봉사가 장려되는 선까지만 용인되는 지도 모르겠다.


 또 개인주의의 기본원리에서 말하는 상대방에게 '해악'을 주지 말라는 명제에서 '해악'이란 무엇인가? '해악'을 끼치는 것은 항상 옳지 못한 것인가? 필연적으로 개인은 영향을 주고 받는데 '해악'을 끼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나'라는 주체를 상정하여 '내'욕망을 믿고 욕망할 것인가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욕망에 초연해질 것인가? 욕망의 선(Line)이란 존재하는가? 그 이외의 해석과 해결책은 생각해보지도 못하였다. 즉, 어쩌면 제3의 길인 기독교적 교리를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신념이 옳지 않다고 쳐다도 보지 않는 것은, 사실 능력이 없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필자는 내가 싫어하거나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 대상은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사실 그건 필자가 그것을 마주할 자신감이 없는 상태, 즉, 그것과 마주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보편적 인간상을 느낄 수 있는 보고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특정한 논리들이다. 이런 보물을 단순히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오류들이 많다고 쳐다도 안 보는 것은 아깝다.


교회를 다니시는 고모님이 사람을 보면서 교회를 다니면 결국 오래 못간다고 하였다. 믿음의 따른 행태는 믿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만연하다면 이를 바라보는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이를 일반화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을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행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신'을 상정하고 기독교적 교리에 따르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에게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도 필자 자신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끝으로 팀 켈러가 인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겠다.

신과 내세가 없다면 ……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사람이 못할 일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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