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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바다 Jan 20. 2024

영화 <조커> 후기

세상을 좀 더 아량 넓게 바라보았으면.

조커를 보니 주인공인 아서에게 몰입이 됐다. 나였어도, 내가 아서였어도 아서와 별반 다른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범죄를 저지르고 주류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을 것이다. 그나마 아서가 나보다 잘한 일은 파멸의 씨앗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나였다면 폭동은 커녕 맨날 광대 옷을 입고는 길가던 행인에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이렇게 아서에게 몰입이 되면서도 빈민, 하층민이라는 존재가 왜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들은 공적인 부분으로나 사회의 단면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걸까.



- 빈부격차와 악

극중 고담시티는 범죄와 고통으로 가득찬 도시이다. 영화 조커가 아닌 어떤 유니버스의 고담시는 낮에는 그나마 살만하지만 밤에는 우리가 아는 그 막장인 도시가 된다고 한다. 하층민도 제법 많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 조커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영화 조커에서는 하층민인 주인공 아서의 삶에만 집중하기에 그것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쥐가 창궐한다가 복지를 줄이겠다는 뉴스는 나오나 실제 그게 하층민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영화 속에서는 콕 찝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다. 대신에 영화는 하층민인 아서의 삶만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 조커에는 유독 빈부격차와 범죄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는 다른 유니버스의 상황과는 다르다. 기존 유니버스에서는 범죄조직이 고담시를 장악한 상황이라면, 영화 조커에서는 빈부격차와 이 빈부격차가 만들어 낸 상황을 더더욱 부각한다. 즉 영화 조커에서는 절대악과의 대립이 아닌 빈부격차가 나타나는 상황 속 인간의 행동 또는 정서를 보여준다. 빈부격차가 나타나는 데에선 무엇이 악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극중에서 아서는 하층민이다. 아서의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취가 있기를."라는 대사를 보면 그는 크게 교육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배우지 못한 것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내"가 무슨 상태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들다는 것은 능력적으로, 또 여건상 둘다를 말한다. 영화 하층민들이 삶이 너무 팍팍하고 힘들다고 하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아서의 상황을 더욱 부각하기 위함일 수도, 혹은 그만큼 하층민들의 고통은 (사회적으로든 어느 방면이든) 표현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수도 있다. 대신 주류의 사고들은 이곳저곳 보인다. 고담시는 복지정책을 줄일려고 하며, 시장으로 출마한 토머스 웨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왜 하층민들의 고통은 표현되지 못하고 있을까.




- 표현할 수 없는 하층민의 고통

하층민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이 표현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층민들은 그 계층끼리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공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끼리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자조적으로 다가가지만, 이는 외부에서는 이해 못할, 혹은 그냥 넘어가도 되는 말이 된다.

난 내 삶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개같은 코미디였어


고담 사회에서는 이를 어떤 문제로도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 모르는 것처럼 넘어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이해는 했지만 "그런데 뭐?"라는 식으로 치부해버렸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실 하층민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닌, 표현을 했지만 그 표현을 진지하게 받아드리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결국 그 마지막은 직접 요구를 성취하는 폭동으로 귀결된다.


당신 같은 사람한텐 아무도 관심도 없어요. 나 같은 사람한테도요. (그의 심리상담사가 아서에게 말하는 말)


정말 순수하게 바라봐서 하층민과 그 주류 계층의 언어가 달라서일 수도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교감 선생님을 기억하는가? 교감 선생님의 단골 대사는 "굿이에요. 굿! 굿! 굿!"이다. 반어법을 사용해 비꼬지만 다른 이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드려 좋은 의미로 이해한다. 이런 것처럼 조커에서도 하층민들의 그 표현들이 어쩌면 주류 계층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과연 그저 토마스 웨인과 다른 상류층은 하층민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폭동과 같은 이런 파국을 만들었을까? 차라리 그들은 하층민에게 관심이 없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머레이의 예를 보자. 그는 건방지게도 쇼가 끝날 때 "이것이 인생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적어도 내게는 "복에 겨워 무난하게 산 놈이 인생은 이런 것이니 참고 견디라고 건방지게 훈수 두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와 다른 세상 밖 사람의 고통도 모르고 말이다. 세상 밖, 그러니까 고담시티는 쥐가 들끓고 여러 병이 창궐하는데 말이다. 아서가 머레이에게 총을 쏘기 전, 아서는 이런 말을 한다.

세상 밖이 어떤지 알기나 해 머레이?



그는 그렇다면 토마스 웨인은 어떨까. 토마스 웨인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특출난 인물이다. 고담시 시장 후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하층민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저 그들을 경멸한다. 그는 광대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가난한 자일 것이라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토마스 웨인에 따르면 가난한 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겁니다. 고담은 길을 잃었어요. ...... 그런 자들이 변해야 합니다. 아니면 노력해서 성공한 우리들 눈에 그런 비열한 자들은 한낱 광대에 불과하죠."

 



- 아량으로 축복받으리

계획과 무계획, 안정과 혼란. 나는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영화 조커가 닮은 점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혼란, 무계획 등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다른 점도 있다. 영화 조커에서는 지금 말한 속성들이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 조커에서의 악은 그 근원이 있었으며(빈부격차)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관심) 그렇게 보자면 악처럼 보이는 것은 척결의 대상이 아니라 융화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층민은 항상 그럴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고(즉 하층민의 고통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하층민의 언어는 항상 주류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안다. 앎이라는 건 곧 타자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이해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많은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를 아량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그저 무관심으로 방관하지 말고 넒은 아량으로 직시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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