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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바다 Nov 21. 2023

의도 있는 소통

지난 주 토요일에 멀리 사는 친구와 모처럼 만났다. 내가 있는 곳까지 놀러 온단다. '이 좁은 곳을 설마 나를 보려고 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곳은 나름(?) 시골이라 주변에 별게 없다. 그러니 내가 있는 곳까지 온다고 하는 말은 감사하기도 하지만 부담도 된다.


친구가 놀러 와 그 친구와 대화를 했다. 그 친구는 속내를 잘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대신 문답이 많은 편이다. 가령 어떤 선택을 할지 내게 많이 물어보는 편이다. 나도 그런 대화는 편하기도 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가끔 서로 격해지는 때가 있다.


그 친구랑 이야기를 하면 가끔 말문이 막힌다. 이번에는 그 친구가 "직장에서 1~2주의 휴가를 받았다면 유럽여행을 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즉시 공격이 들어왔다.


"어차피 그 장기 휴가를 받고 유럽여행을 안 가면 집에서 놀 거나 할 텐데 가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아?"  "일반적으로 장기 휴가를 받으면 해외여행이나 평소에 못해봤던 일들을 하려고 하지 않아?" "앞으로도 유럽여행을 잘 가지 못할 텐데 기회가 있을 때 가는 게 좋지 않아?"


나는 나름 내 생각을 잘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굳이 유럽여행 갈 필요를 못 느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너가 장기 휴가를 받고도 유럽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한 건 일반적이지도 않고 논리가 부족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나에게 어떤 해결책을 바란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가 원했던 대답을 내게 바랐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래서는 원하는 대답을 받기 어렵다. 그 친구는 은근히 내 대답이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어필을 했다.


사람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든 그 논리를 보충하려는 것 같다. 실은 그 사안이 논리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장기 휴가를 받은 때 해외여행을 갈지 말지는 자기마음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 말려들어 내 기호보단 자꾸 내 논리만을 보충했건 것 같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고민하게 됐다. 감정이 상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소모만 있는 대화인 것 같았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는 데엔 서로 목적이 다를 것이다. 누구는 그와 마음이 잘 통해서 같이 이야기 하기 위해, 혹은 그와 만나서 그에게 배우기 위해, 아니면 그저 시간 때우기 위해.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일방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소통이다.


"당신과 만난 이유는 나의 논리가 합당한지 확인하기 위함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공감이 아닌 논리적 대화법이 필요하다. 그럴 때는 서로 논리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 또 "오늘 손님이 나를 괴롭혔어.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논리적 대화법이 아닌 공감의 대화법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다면 이 둘은 죽이 맞는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대화를 열면 그의 이런 마음을 추론한다. 친구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말이다. 그러곤 생각한다. "그 친구가 요즘 힘들어 하고 지금 힘든 이야기를 하니 조금 들어줘야겠다." 혹은 "그 친구가 고민이 많아서 내게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있네. 내 생각을 말해볼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반대일 때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말한다. 가령 나는 그 사람에게 공감을 바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랄 뿐이라는 말이다.


더더욱 간단하게 말하면 친구에게 고민 등을 말할 때 선의도를 갖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줄 때는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면서 말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말할 때는 그저 내 진심 그대로 말한다. 질문 또한 마찬가지이다. 질문은 가볍지만, 대답은 고민 끝에 말한다.


고민 등을 말할 때 의도를 갖지 않고 말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생각하는 것보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일 수 있다. 둘째, 의도를 갖고 말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 굳이 친한 관계에서 내가 의도를 숨길 필요가 있겠냐만은 의도를 그대로 나타내면 정이 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친한 관계에서는 그 스스로가 의도를 갖고 고민을 말하거나 질문(진지한 질문 시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도신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들어줄 때는 나름 어떤 의도를 세운다.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게임의 룰이 토론인가, 아니 져줘야 하는 건가? 져주는 거라고 해도 막상 생각 없이 듣다가는 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은연 중에 선공격을 한 자(이야기를 먼저 꺼낸 자)에게 나름의 배려권을 주는 것 같다. 그렇지만 배려권이라고 하더라도 목적 없는 선공격은 벅차다. 듣는 입장으로서 나는 아직도 그 친구가 내게 어떤 마음을 갖고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


분명 내가 보았을 때 그 친구의 질문은 나의 개인 의견을 물어보는 데서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기호 문제로 접근했다. 하지만 점점 내게 왔던 공격들은 "논리적" 공격이 되었다. 표면적으론 무직이며 유럽여행을 갔다온 나와 직장인이며 아직 유럽여행을 갔다오지 못한 친구 A씨는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싸운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싸운 이유는 내가 그 친구가 그 질문에 관해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혹은 의도)을 파악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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