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폭력은 오직 물리적 피해만을 유발할까?
페미니즘 여성 피해 서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성폭력'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폭력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 성폭력이라는 식으로 말하고파 하는 것 같다. 당연히 성폭력을 겪은 여성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고단한 삶"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폭력은 언제나 '폭력'이라는 단어의 그 원초적 의미에 근접할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 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론이라서 말이다.
군대에는 언제나 (성폭력을 포함한) 별의별 종류의 폭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적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성추행이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폭력은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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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의미에 근접할수록 더 고통스러운 폭력"이라는 나의 주장이 너무 유물론적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오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폭력에 대해 가지는 큰 오해중 하나는, "원초적인 폭력은 물리적인 피해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원초적 폭력은 반드시 관념적, 정신적 피해를 동반하며, 그 정도는 대체로 폭력의 강도와 비례하는데, 물리적 상처가 치유되어도 정신적 상흔은 치유되지 못한 체로 계속 남아있는 경우도 흔하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 하면 보통 어떤 장면이 떠 오르는가? 아마도 전장의 충격에 정신이 반쯤 나가서 구석에 쭈글 시고 앉아 초점이 풀린 눈으로 끝없이 고개를 흔들며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 군인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 오를 것이다. ("스티븐이… 죽었어… 맥스도… 죽었어… 윌슨 중위는… 가루가 됐어… 내 옆에 분명 있었는데… 가루가 돼서… 사라졌어… 스티븐이 죽었어….")
물론 모든 종류의 충격이 PTSD를 유발하기는 한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사례는 언제나 전장의 군인들에게서 나온다. 생사가 오가는, 인간의 모든 존엄함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도 한때 그저 울부짖으며 기어 다니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음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전장의 상황보다 더 끔찍한 폭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이 유약한 사람들이라서? 눈 아래 칼빵이 있는 마동석같이 생긴 형씨들도 전장 끌려갔다가 눈알 풀려서 돌아오는 걸 보면, "그들은 원래 유약했다."라는 분석엔 별로 공감가지 않는다.)
물론 내가 끔찍한 성폭력의 희생자들을 비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단지, 모든 종류의 폭력 중에서 유독 '성폭력의 고통'만을 신성화시킬 필요는 없음을 말하려는 것뿐.
성폭력은 분명 여성들에게 더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자체가 여성에게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성폭력이 가장 심각한 외상을 남기는 폭력인 것도 아니다.
+PTSD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 추가. 처음으로 전장에 투입된 병사들 중 98%는 어떤 식으로 건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그럼 남은 2%는? 보통 이 사람들은 사이코패스일 확률이 높은데 현장의 지휘관들은 이런 부하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애초에 인간성에 대한 신념이 없던 이들이라서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고….
++PTSD를 정말 잘 표현한 영화 '람보'의 명장면 : https://www.youtube.com/watch?v=7TCR_UQhTw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