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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Aug 23. 2023

오펜하이머 실망글. 스포 X

자기만의 세계로 빨려가는 놀란 감독

원래는 공이들 친구들 모아서 단체관람을 할까 했으나, 좌빨영화(?)라는 풍문에 호기심이 동해 결국 혼자 찾아가 시식(?)을 하게 되었더랬다.

좌빨영화 이런 건 잘 모르겠고


혹자의 말처럼 뭐 대단한 물리학 제반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양자역학 빛의 파동성 이런 이야기가 좀 나오긴 하지만 전문적인 대사들 몇 개 정도는 걍 무시하고 봤더래도 '그것 때문에' 감상에 지장이 생긴다거나 할 정도는 아닐 거라고 본다.


진짜 문제는..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매카시즘 광풍 시절 빨갱이로 몰린 오펜하이머가 조사를 당하는 것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그간 살아온 이야기들이 겸사겸사 등장하는 구조이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핵폭발 이야기도 분명 나오긴 하지만, 그게 '기대만큼' 영화의 주력 소재인 건 아니다. 심지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종말도 그저 대사로나 언급될 뿐.

이야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오펜하이머 빨갱이 심문'이다.



문제는 이 취조과정에서 언급되는 주변 등장인물 이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러닝타임이 3시간이라 짧진 않지만, 그 3시간조차 충분치 않을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규모나 이로 인한 인간관계의 복잡성이 지나치게 과도하다.


"그래서 앤드류가 공산당원이라는 건 언제부터 알게 된 겁니까."

"잭슨은 분명 19XX 년 이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했을 텐데요?"

"리처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이런 언급들이 끝도 없이 등장하는데... 아니 씨발 그래서 앤드류가 누구였고 잭슨은 누구지? 또 리처드는 대체 누구였냐고 씨발!!


만약 이게 넷플릭스에 풀린 영화였고, 그래서 넷플릭스로 감상 중이었다면, 톰슨이나 한스가 누군지를 기억해 내기 위해 수십 번씩 '뒤로 가기'를 눌러 재확인하면서 감상해야만 했을 그런 영화란 말이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추가적인 문제가 있다.




삼국지 역시 등장인물이 많기로 악명 높은 작품이지만(1000명 이상) 독자에게 그 등장인물들을 모두 학습(?)시킬만한 충분한 분량이 있고, 결정적으로 철저하게 시간적 인과 순서대로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인물들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해해 감에 큰 문제가 없다.


'오펜하이머'는 다르다. 심문 중에 듬성듬성 오펜하이머의 과거회상이 나타나는 식으로 영화가 진행되는데, 문제는 그 과거회상이 어느 시점에 대한 회상인지를 당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회상은 시간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대를 유추할 만한 일부 대사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했다는군!"

"쏘오련이 북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한 모양입니다."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했어요."

"우린 지금 쏘오련이 아니라 파쇼들과 싸우는 거 아닌가요?"

"스페인 공화파를 지원하려면 공산당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건 언급을 통한 과거회상 시간대 유추 역시 정치사회덕후로써 전간기 스페인내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대전 후 냉전 초기 상황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반지식이 있는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라 그런 제반지식이 없는 이라면 이 마저도 불가능할 것이다.  


가뜩이나 등장인물의 규모나 인간관계도의 복잡성으로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운데 각 사연들을 알려주는 과거회상의 시간순서마저 엉망진창이니 관객의 고통(?)은 증폭될 수밖에..





물론 사람마다 인물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내는데 걸리는 노오력과 시간이 같을 수 없음을 고려해 볼 필요는 있다. 이를테면 이 능력은 인싸일수록 뛰어나고 아싸일수록 저조한 경향이 있는데, 만년 히키 필자의 경우 학창 시절 1년이 다 되도록 반 학우들의 이름과 얼굴을 다 익히지 못했을 정도로 사람에 대한 인식능력이 병적으로 저조하다. 정상과 자폐의 중간즈음이라 해야 하나??


하지만 필자가 그러한 특성 때문에 다른 영화를 볼 때에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을 겪어 왔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거지. 다른 영화들을 볼 때엔 이런 어려움이 없었다. 심지어 놀란 감독의 전작인 인터스텔라 역시 재밌게 감상했었다. 이런 난관을 겪은 건 '오펜하이머'가 처음이란 말인데, 이건 그냥 놀란 감독이 영화를 잘못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독재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종종 말해온 부분인데 사아람이란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하다 해도, 정점에 오르고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는 상태로 오랜 시간을 지내게 되면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하다 후천적 자폐로 이행된다. 처음엔 나름 영민했던 독재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망가지는 건 다 이러한 맥락 때문인 거고.


놀란 감독도 같은 경로를 거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놀란 감독은 '인터스텔라'를 통해 영화감독으로서 정점에 올랐다. 그리고 그러한 '누림'이 지속되면서 서서히 후천적 자폐로 접어들게 된 것 아닌가 한다. 자기만 알아먹을 어떤 중얼거림을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자신의 인싸력을 테스트해 보고자 하는 이라면 이 영화감상이 좋은 시도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영화의 모든 맥락을, 인간관계 도식을 무리 없이 놓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인싸의 자질이 있는 거라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물리학 제반지식 같은 건 없어도 된다.


+등장인물 중 무리 없이 인식이 되었던 이는 주인공이라서 알아먹은 오펜하이머 박사(킬리언 머피), 그리고 특유의 외모와 명성으로 이미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아인슈타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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