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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연민의 과잉이 문제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선택적 공감'과 '공감의 과잉'은 분명히 구분지어야 할 다른 개념

by 박세환

'좌파 병X론'을 구상하는 중이다. 오늘날 '좌파(민주진보/진보좌파)' 진영이 그들이 그토록 외쳐왔던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이 백 년간 '적'으로 삼아왔던 귀족계층에서 더 강한 지지비중이 나오는 현상을 '실패'로 규정하고 그 이유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좌파는 왜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일반 대중들로부터 외면받았나? 왜 그 대중들은 그간 좌파가 극우 대안우파라고 비난해 온 '그쪽' 방향으로 더 호감을 보이는가?


그리고 이 이유를 논하는 여러 가지 기성 설명 중에 특히 마음에 안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 좌파는 너무 많이 공감하고 너무 많이 연민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 이 설명은 기본적으로 "좌파는 지금까지 충분히 잘 공감하고 연민해 왔다."라는 명제가 참임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개 헛소리이다. 좌파가 정말 모두에게 공감과 연민을 주었다면, 좌파는 절대 오늘날처럼 평민 대중들에게 외면받지 않았을 것이다. 가톨릭이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가 천년이 넘도록 힘없는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듯 좌파'교'도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그런 종교들이 천년이 넘도록 사랑받고 지지받아온 이유는, 그들이 포교대상으로 삼았던 무수한 대중들에게 공감/연민받는 느낌을 주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공감과 연민은 인간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공감 연민 따위 없어도 된다면서 이성주의자인 척하는 그 어떤 머저리들도, 그 내면엔 누구보다도 공감과 연민을 갈구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좌파'에게 실망한 건, 그들이 너무 많이 공감/연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공감/연민의 영역에 필자 본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좌파의 공감 연민은 '모두'에게 뿌려지는 게 결코 아니다. '그 공감과 연민'은 그들이 특권을 부여한 소수의 정체성들(종종 인터넷에 조롱조로 올라오는 흑인 여성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어쩌고 그런 거), 그리고 만 원짜리 친환경 커피를 홀짝이며 자신들의 특권적 우월함을 뽐낼 수 있는 비좁은 바운더리 내에서만 작동해 왔다.


다시 말 하지만 '좌파'는 '모두에게' 공감과 연민, 사랑을 준 일이 없다. 그러니, "좌파는 너무 많이 공감하고 연민해서 탈."이라는 식으로 떠들면서 그들을 예수, 부처로 만들어주는 우는 이제 제발 그만 범하도록 하자.



+푸바오를 보며 울어재끼는 뉴스들이 지겹고 한심한 이유는

저들의 눈물이 푸바오에게로 향하기 때문이 아니라

저들의 눈물이 푸바오에게'만' 향하기 때문이다.

(쓸쓸하고 소외되고 죽어가는 지천에 널린 약자 이웃들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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