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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와이 May 30. 2021

떼네리페(Isla Tenerife), 그 섬 2

여행에 대한 버킷리스트

내 마음속의 여행에 대한 버킷리스트 몇 가지.


- 사막

- 오로라

- 그리고 하늘 가득히 쏟아지는 별빛 보기


가라치코에서의 실망감으로 울적해진 내 맘을 알아챈 걸까. 이 섬이 내게 자기의 보석함을 열어 몇 가지 보물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생각지 않게 버킷리스트에 첫 체크표시를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섬, 떼네리페에서.



[3] 아름다운 적막함 떼이데(El Teide)


El Teide. 엘 떼이데.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El 이 이름에 당당히 따라오는, 떼네리페의 영혼인 산.


떼이데 국립공원(Teide National Park)의 중심엔 3,718m 높이의 떼이데삐꼬 비에호(Teide-Pico Viejo)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봉우리는 해수 바닥에서 측정했을 때 7,500m가 넘는다고 하며,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화산 지형이라고 한다. ‘Teide National Park’라는 이름으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그야말로 지구가 품은 보석 중 하나.


더욱이 우리가 떼네리페에 머문 2020년 7월 13일~8월 3일은 그믐부터 만월까지가 골고루 포함되어 있는 기간이었기에, 떼이데 산의 여러 얼굴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각기 다른 날 만난 떼이데의 모습을 여기에 공유하고자 한다.

그의 낮과 황혼, 한 밤... 그리고...



- 구름의 바다


질감과 색조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기 상태와 테이데 화산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는 ‘구름의 바다(sea of clouds)’...<유네스코 세계유산 설명 중 발췌>


숙소에서 떼이데 봉까진 차로 5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연간 4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던 곳이어서인지 길은 매우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역시나 코로나 때문인지 흔한 관광버스 한 대 볼 수 없다. 덧분에 길은 여유롭고 가끔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경쾌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산 중턱을 오를 즈음 스트리밍으로 듣고 있던 음악이 인터넷 접속 불량으로 끊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 사이에 우리는 구름 위에 올라와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땅인가 섬인가


저 멀리 보이는 검은 지형의 정체를 두고 남편과 내가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섬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산자락 쪽에 있는 los gigantes(로스 히간테스-거인들, 거대 절벽 지형) 이 보이는 거라는 게 내 의견, 바다 건너 섬들이 보이는 거라는 게 남편의 의견이었지만...


우리의 결론은 떼네리페의 형제섬인 라 팔마 La Palma 섬. 라 팔마에도 해발 2400m 이상의 칼데라 지형이 있기 때문에 구름 위에서도 보이는 것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맺었다.

섬들까지 보이는 그야말로 구름의 바다.

햇볕과 바람에 넘실거리는 구름의 모습.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이 담겨 있는 거대한 크림 단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 멸망한 지구에서의 드라이빙, 라스 카냐다스(Las Cañadas)

차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보통 산에 흔하게 붙어있는 사슴 주의(스페인에선 소주의...) 등의 표지판이 하나도 없다..?

황량한 풍경.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다니.

검은빛의 돌더미, 흙더미를 간신히 덮은 잡목들이 어느 정도 보였지만, 단연코 이 지역의 주인은 ‘생’이 아닌 ‘무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4만 년이 넘는 생성 기간 동안 대지에서 뿜어져 나왔을 뜨거운 기운들의 결과물인 이 황량함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절경을 이룬다.

지구가 멸망한 후,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거친 잡목만 몇 그루 보일 뿐, 동물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지역의 명칭은 라스 까냐다스 Las Cañadas, 지름이 12 ~ 20km 인 화산 칼데라이다. 이 지역이 강력한 폭발로 인해 성층 화산*인 떼이데 봉을 형성할 때, 마그마와 가스가 분출되며 특유의 울퉁불퉁하고 거친 지형을 만들어 냈다.

* 성층 화산 : 용암류와 화산재, 화산탄, 화산암괴 등의 강하 화산 쇄설물층이 쌓여서 생긴 원뿔 모양의 화산체


실제로 1909년 경까지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떼이데는 지질학상 활화산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마치 멸망한 지구와 같은 이질적 느낌을 주는 이 곳 어딘가에 진정한 지구의 생명력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두려우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 떼이데 삐코 비에호 Teide Pico Viejo, 그리고 신의 손가락

떼이데 삐코 비에호, 즉 떼이데 봉은 테이데 산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화산 지형으로 만들어준 중앙의 화산 봉우리이다.

그날의 날씨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떼이데 산

 매끈한 경사면을 가지고 여왕과 같이 곧게 뻗은 떼이데 봉을 비호하듯이 주변엔 갖가지 기암괴석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바위들 사이를 지나가 본다. 곁에서 보면 실로 거대하고 오묘하게 생긴 바위들에 압도당하고 만다.


자연이 빚은 조각상들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수호하는 스핑크스의 느낌이 이럴까? 사람이 빚어낸 것도 아닌데 마치 각각 의도를 가지고 조각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가까이서 보면 왠지 금세 움직일 것만 같아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목을 쭉 빼고 있는 것 같은 특징적인 저 바위의 이름은 ‘신의 손가락’. 또 어떤 바위는 신화 속 골렘처럼 금세 몸을 펴고 일어날 것만 같다.


떼이데의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케이블카도 있는데 코로나로 휴업 중이었다. (20년 7월 말에 새로 오픈하긴 했지만, 코로나 문제로 케이블카는 타지 않기로 했다) 떼이데 봉의 산자락은 완만하지만 정상 쪽으로 갈수록 급경사여서 만약 타게 된다면 바위산을 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아찔하지 않을까.



- 떼이데의 황혼

고고한 떼이데 봉과 그를 둘러싼 위엄 있는 라스 까냐다스...그러나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그들 위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림자와 함께 물들어가는 오렌지색, 연한 보라색, 군청색의 하늘. 하늘을 향해 뻗은 위압적인 존재들도 결국 태양이 지면서 어둠 속으로 묻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위압적인 암석들도 이젠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그렇게 변해가는 하늘과 함께 떼이데에 밤이 찾아오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별빛과 달빛

모 항공사의 광고 하나가 마음에 꽂힌 적이 있다. 호주 쪽 여행지로 항공 직항이 출항한다는 거였는데, 광고 중 온 하늘 가득히 빼곡한 별들이 담겨 있는 한 컷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래서 마음에 담게 된 버킷리스트

‘하늘 가득 쏟아지는 별 보기’.


그날은 저녁을 든든히 먹고 아이들이 잠들 것을 대비해 미리 씻기고 잘 준비까지 마친 후, 떼이데 봉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산 정상 쪽에 가까워지며 점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달리는 차의 선루프를 통해서만 보아도, 수많은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난히 맑았던 그날, 그리고 유난히 어두웠던 그날(의도치 않게 그날이 그믐이었다), 마치 광고 속 하늘처럼 하늘 가득 더 찰 수 없을 만큼 가득한 별들을 보았다.


교정시력도 1.0 정도로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나지만, 이 눈 만으로도 수많은 별들을 품고 여름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 별자리에도 포함되지 않아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수많은 별들을 만났다.

게다가 그 당시 북두칠성 즈음을 지나치고 있던 혜성 니오와이즈(NEO-WISE) 도 맨 눈으로 볼 수 있었다. 4500년 주기를 가지고 지구를 찾는다는 그 친구를 어렵지 않게 하늘에서 찾았을 때의 기쁨이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성능이 좋은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그믐날 밤, 별 사진 찍기에 좋다고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이 곳에 작가들이 모인 것 이리라.


사실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구형 핸드폰으로 찍어봐야 그 모습을 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둘이 차에 기대어 검은 별 비단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덧 잠에서 깬 첫째가 와서 응석을 부린다.

엄마 아빠와 함께 본 이 별 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를.


그로부터 2주 뒤, 다시 올라간 떼이데는 만월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로스 까냐다스의 울퉁불퉁한 봉우리 위로 어느 한 점에 진주빛이 비추다, 곱고 둥근달이 빠꼼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시간이 더 흐르자 달은 주변의 별빛을 압도하며, 그 어느 가로등보다도 밝고 넓게 이 장소를 비추었다.

떠오르는 진줏빛 둥근 달
달이 있는 밤. 넓게 세상을 비춘다.

 

어느덧 차를 가지고 모여든 젊은이들(차에 대문짝만 한 L 자가 붙어있는 걸 보니 운전면허를 딴지 얼마 안 된, 생애 첫 차를 몰고 온 젊은이들인 것 같다.)이 트렁크를 열고서 삼삼오오 모여 만월의 밤을 즐기기 시작했다. 달빛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진주빛을 드리워주고 있는데도, 왠지 그들에게 빛이 더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들이 흥에 겨워 쿵짝거리는 음악을 틀기 시작할 때쯤, 이 가족 여행자들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떼이데 산에서의 모든 순간, 단 한순간도 지루한 순간이 없었다. 매번 다른 날마다 다른 모양의 보석을 꺼내어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꼿꼿한 봉우리와 암석들은 하늘하늘 파아란 비췻빛 옷을 입을 때도 있고, 수많은 보석이 박힌 까만 드레스를 입기도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세상에서 가장 큰 달빛 진주 목걸이를 걸기도 한다.


무엇보다 마음 뛰었던 점은, 검은 사막이 보여주는 황량함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생명의 기운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화산재에는 영양분이 풍부해서 매우 비옥한 토양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진 인간의 삶의 시간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긴 지구의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내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선 보지 못할 그 긴 과정의 한 순간을 지켜봤다는 것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누구나에게나 여행을 통해 경험해보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복닥거리며 사는 삶에 맞추어진 내 마음 한구석엔 비어있음에 대한 갈망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사막에 가보고 싶은 거 아니었을까. 하지만 사실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황량함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기운을 받고 싶었던 것이라는 것을 이 곳, 떼이데에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떼이데에서의 별과 달과 해와 구름을 떠올리며, 시 한 편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3편에서 계속>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 같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채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는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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