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어서 하는 것 들
난생처음 해외에서 살아본다는 기쁨(이라 쓰고 얼떨떨함이라 읽는다) 취해 며칠을 지내고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오면서부턴 아니 이제 뭐부터 해야 하지? 란 현실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젠 덜걱 겁도 나기 시작했다.
스페인이라.
우리 부부는 십 년 전 신혼여행의 일부로 스페인에서 약 십여 일을 보냈다. 매우 편안한 패키지여행으로!
모닝콜해서 깨워주고, 눈뜨면 밥을 먹을 수 있고, 자고 나면 다른 도시에 도착해서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며 여행할 수 있던. 그러나 이제는 현실 스페인 살이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단 몇 개의 종류로 일을 구분해보기 시작했다.
1. 할 것
- 출국일 정하기
- 살 집
- 아이들이 갈 학교 정하기
2. 짐 싸기
3. 버릴 것
- 직장 및 학교 정리
- 집 빼기
- 짐 빼기
- 자동차 팔기
-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기....
우리는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 힘들게 돈을 번다. 돈을 벌어서 먹고, 입고, 잠자고 그리고, 언젠가는 쓰레기로 버려질 것들을 이렇게나 많이 사고 있다!
리빙의 모든 카테고리를 통틀어 가져갈 것과 남기고 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각각의 물건에 내 욕심과 집착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측정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들도 용이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이면 괜찮다. (심지어 한 번도 안 쓴 세제나 샴푸 같은 것도 처박혀 있었다. 있는 것도 모르고 또 사서 쓰고 있던...) 주거나, 팔거나, 그러지 못할 거면 버리면 되니까. 더 큰 문제는 그런 물건이 아닌 것들, 즉 책이나 앨범이나 아이들의 그림이나 작품들 같은 것이다!
처음 아이가 크래용을 잡고 그려낸 그림의 색감에 매혹되며, 내 아이의 천재성(?)을 의심해 보았던 그때의 나는 아이가 그린 종이 쪼가리 하나도 파일링 해 모아두는 성실성을 (혹시나 나중에 박물관에 전시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발휘하고 있었다. 차마 버리지 못한 그 성실한 시간들은 지금 어느 박스 안에 담겨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장난감들. 마트나 놀이공원에 갈 때마다 성화에 못 이겨 뽑아주곤 했던 뽑기들, 한 때 반짝 주인을 기쁘게 해 주다 영영 장난감 통 어느 구석으로 들어가 빛을 보지 못했던 그런 녀석들이 정리 통에 수천 마리(내 체감 상) 쏟아져 나왔다. 이 것들도 다 하나하나 돈인데...!
50리터 일반쓰레기 봉지를 옆에 두고 과감히 휙휙 집어넣다가도 내가 아! 이건 그때 거기서 샀던 건데~ 하며 마음이 약해져 남겨두고 온 물건들이 아직도 꽤나 된다.
책과 앨범들도 문제였다.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흑백사진 모드로 찍은 커다란 웨딩 액자, 그때는 내가 참 예뻤구나 정도는 느끼게 해 주지만 앞으로 이걸 어디 걸거나 꺼내놓을 리는 절대 없을 것 같은... 그리고 내가 중학생 때 엄마가 큰 맘먹고 사주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세계문학전집. 이런 것들은 내 마음상 버리려야 버릴 수가 없었고, 그나마 추려낸 책들은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거나 하며 정리했다. 책도 오래되면 중고상에서 가져가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시류에 맞물려 나오는 정보 서적들은 다시 펴보기도 싫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것들도 다 돈이다, 돈이었다. 고로,
그렇게 버리고서도, 이제는 사서 가져가야 할 것들을 체크하는 나를 보며 다시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