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결국 답은 '퇴사'뿐인가?
유리와 나는 대한민국 중소기업 인사팀의 막내들이다. 중소기업이긴 하지만, 주변 어디에 이야기를 해도 '아, 그 회사!'라고 이야기하는 나름 유명한 회사다. 그래서인지 부모님들은 이 회사의 급여가 적든 복지가 어떻든, 어디 가서 '우리 딸내미가 이 회사에 다닌다'라고 이야기하기 좋아하신다. 효도하는 기분에 입사 초반엔 뿌듯했고 회사에 열심히 다니겠다는 의욕도 마구 솟았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밤에 잠을 자기 위해 누우면 심장이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이며 요동을 치고, 잠이 슬쩍 들었다가도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는 일상이 몇 달째 지속되자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효도하는 심정으로 회사에 다니다가 서울 낯선 도시에서 객사한 딸내미의 송장을 치우러 오게 하는 불효 막심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심했다. 더 이상은 못 다니겠다!
앞서 소개 한 유리(참고로 가명이다.)는 이 회사에 다닌 지 3년이 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하여 들어온 첫 직장에서 회사 직원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영원한 막내 이미지를 유지 중이지만 사실 지독한 아홉수를 겪고 있는 스물아홉 살이다. 나름 즐겁고 무난한 직장생활을 하던 유리는 유리의 커리어를 더 키워주겠다는 인사팀장의 결정으로, 3년 차 때에 타 부서에서 인사팀의 총무 자리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리의 악몽 같은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유리를 데려 온 것이 정말 총무 업무 능력을 뛰어나게 수행하길 바라서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정확히 인사 발령 후 한 달째가 되던 날이었다. 사장의 생일을 조촐(?)하게 준비하여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인사 팀장은 유리에게 건배사를 시켰다. 아무것도 준비를 하지 못 했던 유리는 당황했지만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조곤조곤 건배사를 마쳤다. 모두가 '엄빠 미소'로 유리를 쳐다보았지만 단 한 사람만 웃지 않았다. 바로 팀장이었다. 팀장은 인사팀의 과장에게 유리의 험담을 했고, 그 험담은 이내 나와 유리의 귀에도 전달되었다. "유리 걔는 왜 그렇게 애교가 없어? 예전에 있던 막내는 사장님한테 애교 부리고 팔짱도 끼고 그랬는데, 그런 거 잘할 줄 알고 데려왔더니 생각보다 숙맥이네!"가 바로 그 험담의 내용이었다. 그 험담을 듣고, 나는 유리에게 미안해졌다. 왜냐하면 그 험담은 원래 나를 겨냥해 왔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잠깐 스치듯 방송국의 교양국에서 작가 시절을 거쳤다. 2년 차가 되던 어느 날,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방송국에서 나와 진로를 찾기 위해 약 1년간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인사팀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있었다. 중고 신입사원으로 열심히 일 하던 첫 직장이 '망해서' 1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천천히 일자리를 찾아볼까 하고 마음먹은 차에, 지금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별 다른 기대도 없었기에 긴장도 하지 않아서였을까, 팀장은 긴장하지 않고 말을 조곤조곤 잘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날 곧바로 합격 연락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안에서 소문난 '모태 무뚝뚝이'였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말을 잘하지 않았고, 남의 사생활에도 관심이 없었다. 사람이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 라는 마인드로 살아온 30년의 세월의 짬은, 내가 인사팀의 젊은 여자 직원으로서 사장님께 예쁨 받을 수 있는 교태(!)를 갖춘 적임자로 생각하고 채용한 팀장을 적잖이 당황시켰다. 여지없이 위에서 언급된 '예전에 있던 막내'가 소환되었다. "미연 씨, 예전에 있던 막내는 사장님한테 애교도 부리고 큰 소리로 인사도 드리고 그래서 엄~청 예쁨 받았어!" 아, 그 막내는 그래서 예쁨 받았구나. 그런데 어쩌나? 나는 그 막내가 아닌데. 우리 팀장은 아무리 낯을 가리고 본성이 무뚝뚝한 사람도, 구직을 위한 면접장에서는 낯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자신을 어필한다는 걸 몰랐을까? 명색이 인사팀 팀장인데.
그놈의 '예전에 있던 막내'(이하 '예막'씨라고 부르겠다)는 잊을 만하면 팀장의 입에 오르내렸다. 특히 인사팀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더 자주 소환되었다. 그쯤 되면 '예막'씨는 귀가 간지러워 이비인후과에 들락날락거렸을지도 모른다. 팀장이 말하는 '예막'씨는 예쁜 외모에 엄청난 친화력과 애교를 보유하고 있던 인사팀의 막내, 인사팀의 '꽃'으로서 행사만 했다 하면 준비부터 진행까지 척척 해냈다고 한다. 특히 임원들을 전담 마크하며 임원들의 얼굴에 함박 미소를 띠게 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속으로 '비위도 좋네'라고 생각했다. 어찌나 예뻐했는지, 다른 직원의 가방을 보고 "어, 이거 '예막'씨가 가지고 다녔던 가방이랑 똑같네!"라고 할 정도로 일상생활 내내 '예막'씨를 떠올리고 이야기를 해댔다. '예막'씨는 애교와 붙임성 덕분에 사장과 본부장의 총애를 받았고, 어부지리로 인사팀은 종종 발생하는 실수들에 대한 지적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사장과 본부장의 짜증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달콤함을 잊을 수 없었던 팀장은 나와 유리를 어떻게든 '예막'씨처럼 만들기 위해 안달복달이었다.
모순이었다. 인사팀에서 솔선수범하여 성 역할 고정관념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업무를 잘 수행해서 월급을 받기 위해 이 회사에 들어온 것인데, 업무보다는 애교를 요구하는 것은 나를 직원이 아니라 '애교 부리는 여자'로 채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유리는 단 한 번도, 팀장이 우리 둘 외에 다른 팀원들에게 애교를 강요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비서가 자리를 비워 사장의 커피를 내려주는 것도 나나 유리의 몫이 되었다. 그놈의 커피가 뭔지, 나나 유리가 자리에 없고 다른 팀원들이 모두 자리에 있어도 팀장은 나나 유리를 찾았다. 커피를 타 대령해야 하는 건 '젊은 여자'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팀원 중 또 다른 여자 직원인 과장님은 이 업무에서 예외였다. '결혼 한 아줌마'였기 때문이다.
팀장의 '예막'씨에 대한 집착은, 어느 날 '예막'씨 염불을 외우던 팀장 앞에서 여느 때와 달리 감정을 못 숨긴 나의 짜증 가득한 깊은 한숨과 함께 날아갔다. 그리고 여지없이 뒤에서 한 험담이 돌고 돌아 나에게 도착했다. '쟤는 팀장이 이야기 하는데 태도가 싸가지 없다'고. 결국 팀장은 무엇이 문제인 지를 끝까지 깨닫지 못 했다.
'예막'씨의 이름은 잊을 만할 때쯤 팀장의 입을 통해 내 고막으로 파고든다. 여전히 '예막'씨를 잃지 못하는 팀장의 무의식 적인 습관성 '예막'씨 찾기 덕분에, 나는 평생 '예막'씨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