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는 왜, 학교에서 젤리괴물과 싸우고 있을까?

당신의 직업, 당신의 전공과 얼마나 관계가 있나요?

by 연느


* 본 글에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글에 나오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등장인물 설정은 원작 소설의 설정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 글은 제가 다니는 회사의 블로그에도 동일한 내용으로 포스팅되어있다는 점 안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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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과 '홍인표'가 손을 꼭 잡고 있는 이유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넷플릭스 시리즈 드라마가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보건교사 안은영>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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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젤리 괴물이 보이는 능력을 가진 안은영이, 학교와 아이들을 위협하는 젤리 괴물들과 싸우며 재능 기부하는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습니다.


장난감 BB탄 총과 형형색색 발광하는 장난감 칼로 젤리괴물을 쿡쿡 찌르는데요, 젤리 괴물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허공에 총질과 칼질을 하는 안은영의 모습이 굉장히 괴팍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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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표는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자이자 한문 선생님이라는 설정의 '왕자 클리셰'를 가진 인물인데, 어릴 적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는 장애를 가지게 됩니다. 그 때문인지 여자들에게 크게 인기는 없다는 설정을 가진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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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은영의 눈에 홍인표는 굉장히 '좋은 기운'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안은영에게 홍인표는 아주 탐나는 기운을 가진 동료 교사인데요, 안은영이 각종 지방의 사찰을 다니며 '좋은 기운'을 수집하는 것의 몇 배의 기운을 가진 부러운 존재가 바로 한문 교사 홍인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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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표의 판단 미스로 인해 지하실에 있던 압지석이 뒤집히자, 온갖 나쁜 기운들이 학교를 휘감아 버립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옥상으로 뛰어올라 가서 뛰어내릴 듯이 철창을 기어오릅니다.


안은영의 눈에는 아이들을 삼키려는 거대한 젤리 괴물이 보이지만, 줌바를 가장한 퇴마 의식(!)으로 이미 기운을 다 한 BB탄과 장난감 칼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대로 삼켜지는 것일까, 안은영이 체념하고 있을 때 안은영의 손에 홍인표가 날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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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홍인표의 손이 안은영의 손에 닿자마자 홍인표에게 있던 '좋은 기운'이 안은영에게 전해집니다. 더불어 BB탄 총알에도 기운이 가득 스며드는데요, 그 덕분에 안은영은 거대한 젤리 괴물을 퇴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홍인표는 이후 안은영의 훌륭한 보조배터리가 되어 그녀의 퇴마를 돕게 됩니다.


f1fa3d6681fc31407272271949b53c9b6dee969a.gif?type=w966 젤리를 퇴치하는데 왜 저렇게 딱 붙어 손을 맞잡고 있는지, 이제 아시겠죠?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안은영은 왜 보건교사가 되었을까요? 무당 행세를 하며 퇴마 의식을 하면서 슬쩍 부적을 끼워 팔거나 굿을 하며 돈을 벌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덕업일치, 누구나 가능하면 좋겠지만.


(%EC%8B%9C%EC%82%AC%EC%9A%A9)today_26th_232_master.00_03_25_10.%EC%8A%A4%ED%8B%B8932.png?type=w966 출처 : 온스타일 [열정같은소리]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의 '직업'이 되는 것은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종종 좋아하고 잘하는데 나의 직업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cwh.PNG?type=w966 드라마 '멜로가 체질' 속 방송작가의 모습

이 포스팅을 쓰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방송국에서 일하는 방송 작가가 되어, <1박 2일>같은 세대를 아울러 사랑받는 프로그램이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드라마 대본을 집필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실제로 중학교, 고등학교 장래희망과 롤링 페이퍼에도 방송작가가 되겠다고 쓰여 있을 만큼 오랫동안 품어왔던 소중한 꿈이었습니다.


때문에 대학교 전공도 '문예창작'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하기도 전에, 동기들 중 제일 먼저 방송국의 막내 작가로 채용되었습니다. 그것도 외주사가 아닌 공중파 방송국 소속이자 지금도 이름만 대면 전 국민이 아는 프로그램으로요!


밤을 새우는 일도, 자료 조사를 하기 위해 연락한 상대방에게 핀잔을 받는 일도, 업무에서 실수를 했다고 욕을 먹었던 것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시간이 지나 프로그램을 옮겨 대본을 작성하고 생방송에 투입이 되며 새벽 3시에 출근을 하고, 주말도 없었지만 괜찮았습니다. 점점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차이를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 말이죠.


안타깝게도 저는 대본 쓰는 재주가 없었습니다. 작가인데 대본을 쓰는 재주가 없다는 것은, 안은영에게 BB탄 총과 장난감 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대본을 처음 써 보는 대다수의 작가가 처음부터 대본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대본을 쓰면 쓸수록 더욱 무서워졌습니다. '백지의 공포'에 숨이 막히고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 글 쓰는 것과는 전. 혀. 상관없어 보이는 HR 담당, 5년 차 인사 쟁이가 되었습니다.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해 보지 않았던 무스펙자였기 때문에 아주 어렵게 사무 보조 업무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적은 인원을 관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업무가 어렵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점점 경영지원 쪽의 업무까지 맡게 되다가, 인사 보조 업무에서 본격적인 인사 업무까지 맡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 나 이거 잘 맞는 것 같은데?




어쩌다 발견한 적성


HR 담당자로서 인사 파일을 정리하다 보면 저처럼 전공과 직업의 관계가 영 딴판인 분들이 많습니다.


1. 대기업 직원에서 파견회사 소속의 파견직이 된 '지니'


이전 근무지에서 친했던 동기, 공대 출신의 '지니'를 소개합니다.


공대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지니는 전자기기로 유명한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며 가족에게는 자랑이, 주변 친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ddd.PNG?type=w966 대기업 인재를 대표하는 미생 '안영이'


그런데 연차가 쌓일수록, 본인이 잘하는 업무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인에게, 남들에게 좋아 보여 선택한 직장과 업무였지만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점점 기가 죽고 자존감이 낮아졌다고 하네요.


어느 날, 직무와 관련된 사내 교육을 듣던 지니에게 문득 사내 교육 강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직무 고민이 없었을 때엔 생각 없이 듣던 교육이었지만, 고민이 시작된 이후 듣게 된 강의에서 강사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고 합니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강사의 모습은, 자신이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아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자신이 있었던 지니에게 새로운 꿈이 되었습니다.


지니는 곧바로 학원을 등록하고, 퇴사 의사를 밝혔습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배우다 보니 점점 진로에 대한 확신이 생겼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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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지니는 백화점 내 사내 교육을 하는 파견회사 소속으로 경력을 쌓아갔고, 중소기업에서 교육 담당자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갑니다.


연봉이 반토막 나서 작고 소중해졌지만, 잘하는 일을 자신 있게 하다 보니 자존감도 회복되고 향후 진로에 대한 계획도 착착 진행됩니다.


만약 지니가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내 교육 강사'라는 길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지니에겐 스스로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신이 생겼거든요.



2. 역사의 흐름을 배우던 'Ha님'이 제품의 흐름을 관리하게 되기까지


저의 현 직장에도 전공과 담당 업무가 매치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SCM팀의 Ha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Ha님은 고등학생 시절 역사 선생님이었던 담임선생의 영향으로, 역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직업적인 부담도 크게 느끼지 않았고, 공부를 추가로 한다고 해도 전공인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진로를 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사를 배우다 보니, 각 나라의 언어도 공부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흥미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요.


cb72c65c7b41a3d86c2daae5ea401eac.jpg?type=w966 전설의 '0개 국어'

그러던 중, Ha님이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활동 겸 필리핀 아이들을 교육해 줄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휴학 후 필리핀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영어 공부도 하다가 쉬는 날에는 필리핀 현지를 둘러보고는 했다는데요, 우연히 들린 쇼핑몰에 한국 제품들이 많은 것을 본 Ha님의 호기심이 별안간 발동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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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제품들이 어떻게 필리핀으로 왔을까'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은, 1년 후 Ha님이 한국에 돌아와 복학 후 국제통상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세계 언어들을 모두 공부해야 하는 역사와는 달리, 영어 하나만 잘하면 시험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어서 이해도 잘 되고 재미있었다는 단순하고 귀여운(!) 이유로 흥미도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물류파트에서 SCM이라는 직무를 알게 되어 지금의 SCM팀으로 오시게 되었다고 하네요.



'좋아하는 것'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나 지니나 Ha님이나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지금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잘하는 것'에는 '어쩌다 보니 좋아져 버린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아무리 잘하는 것이어도 좋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나의 직업 타이틀로 정하기는 힘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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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도 퇴마사 대신 돈을 벌기 위해 간호대를 선택하여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환자들의 병든 기운이 가득한 새벽의 병원에서, 악한 젤리 괴물들과 기나긴 싸움을 하던 안은영은 결국 병원을 그만두고 보건교사를 택합니다. 죽음의 기운보다는 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젤리들과 있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홍인표도 이사장이었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문 교사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잘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IMG_9359.gif?type=w966 비록 다 부서졌지만, 어찌어찌 학교는 대충 구했습니다.

그렇게 교사가 되어 학교에 들어온 안은영과 홍인표는 결국 본인들이 '잘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안은영은 엉뚱한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열심히 BB탄을 쏘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학교를 지켜나가고, 홍인표는 그런 안은영이 지치지 않도록 열심히 보조배터리 역할을 하며 손과 품을 내어주고 '우당탕탕 젤리 퇴치 대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ShamefulEnlightenedBaboon-size_restricted.gif?type=w966 서로 잘하는 것을 하다 보니 서로가 좋아져 버린 것은, 저희와 같으면서도 굉장히 다르다는 함정.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했던 전공이나 분야가, 어느 날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셨다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고민해 보세요. 여행을 가거나 일을 그만둬 보기도 하고, 다양한 문화생활도 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직업의 타이틀로 정하고 싶은 분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나이 때문에 못 하는 것, 저는 키즈 모델과 고등 래퍼 출연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시간이 아까워서,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결심과 용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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