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데다가, 액면가는 20대 초반이라 어딜 가나 대학생으로 오해받는 만년 막내 이미지인 유리는 이 회사의 공식 순둥이이자 귀염둥이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말투와 시원시원한 웃음, 밝은 표정으로 보는 사람마다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유리 덕분에 하루에도 다섯 번씩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었던 내가 그나마 회사에 정을 붙이고 다니고 있을 정도다. 그런 유리에게 엄청난 시련이 몰려오고 있다. 일명 '유리의 수난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리가 인사팀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아직 나와 서로 존댓말을 썼던 시절, 유리가 일주일간의 긴 휴가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회사 영업사원들의 에그가 구 모델인 데다가 인원에 비해 남아도는 것이 많아서, 신 모델로 대대적인 교체 작업을 실시했다. 당연히 총무인 유리가 수량조사 및 모델 조사를 하였고, 영업사원이 10명이라면 임원들과 여분으로 15개 정도를 구입하기로 하고 품의를 진행했다. 일사천리로 결재가 끝났고, 구 모델을 모두 수거한 후 새 모델 지급까지 쉽게 마무리 됐다. 유리의 휴가가 시작되는 대망의 토요일 하루 전 날인 금요일, 내가 불금을 위해 앞 뒤 보지 않고 회사를 뛰쳐나갔을 때에 일이 터졌다. 당장 다음날부터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유리가 업무를 하나라도 더 마무리하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남아있었는데, 갑자기 팀장이 유리에게 자신의 에그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한 유리는 '팀장님 건 없죠~'라고 웃으며 대답했는데, 유리의 말을 들은 팀장은 얼굴이 터질 듯 화를 냈다고 했다. 어떻게 인사팀장의 몫이 없을 수 있냐는 게 분노의 이유였다.
처음부터 영업직의 몫으로 있던 에그였고, 교체 품의 계획서들을 모두 아무 말 없이 통과시킨 팀장이 불 같이 화를 내자 유리는 당황했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이미 인사팀의 몫으로 에그를 하나 빼놨었던 상황인지라, 더 이상의 에그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인사팀장을 감히 일개 사원이 물로 본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팀장은 좀처럼 화를 누르지 못하고 유리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인사팀장에게는 법인 차량도, 에그도, 그 외에 지급되는 모든 선물과 물품이 모두 따로 챙겨져야 한다는 '상식'을 모르냐면서. 내가 본 취업규칙에는 분명 임원과 영업직들에 한해서만 지급되는 물품들을 빼돌리면 '횡령'이라고 읽었는데, 인사팀장으로서 보는 취업규칙은 조금 달랐을까? 한참 소리를 지르던 팀장은 제 화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귀가했고, 유리는 억울하고 허탈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업무를 마무리 짓고 집으로 갔다고 했다. 월요일에 출근한 후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유리 씨 다음 주부터 안 나오겠네요."라고 말했지만, 다행히도 유리는 특유의 사람 기분 좋은 미소로 출근해 줬고, 인사팀장은 그런 유리에게 속이 뻔히 보일 정도로 오버하며 잘해주었다.
그렇게 첫 단추가 애매하게 꿰어진 유리의 총무 생활은 계속해서 삐그덕 대기 시작했다. 부서 특성상 많은 직원들과 부딪히는 인사팀이기에 여러 가지 민원 및 질문을 받는데, 모든 질문에 귀찮다는 듯할 말만 하는 나와 달리 유리는 어떤 질문이든 정성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덕분에 회사의 공식 싸가지(!)가 된 나와 달리 유리는 항상 예쁨을 받았는데, 유리를 만만하게 보는 직원들이 생긴 것도 바로 그쯤부터였다.
CS 부서지만 CS 응대가 싫다던 대리는 어느 날 자신이 회사 구내식당에서 먹은 식수의 값이 자신이 회사에 나온 날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사파트 막내인 내게 먼저 문의했으나 인사 멘트도 안부 멘트도 없이 '식수는 총무 쪽에 물어보세요'라는 내 한 마디에 기분과 자존심이 팍 상한 상태로 유리에게 연락을 했는데, 유리가 조곤조곤 그 이유를 설명 해 주자 그래도 자신은 이해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고집을 부렸다. 그 대화를 지켜보던 내가 유리의 키보드를 빼앗아 다시 딱딱한 말투로 A부터 Z까지 설명해 주고, 결국 '식사로 인한 돈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대리님이 먹은 만큼만 공제된 것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지금 자기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 같냐고 발끈하며 사라졌다. 'CS 응대는 CS 부서에서 알아서 하라'는 인사팀장의 명령에 기분이 한껏 나빠진 상태였던 대리는 사사건건 인사팀과 관련한 모든 일에 시비를 걸었지만, 지민이에게 그 대리의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 그의 특성을 파악한 나는 그가 싫어할 만한 포인트를 골라 조곤조곤 응대해 줬다. 그냥 인사팀이 싫어서, 그 돈 4천 원이 아까워서 시비를 건 것이 맞았기에 내 답변에 발끈했을 수밖에.
그리고 그 4천 원 때문에 예민해진 직원이 하나 더 나타났다. 그를 ACB 대리라고 칭하겠다. 먹지도 않은 밥 때문에 식수가 차감되는 것이 싫다며 한 바탕 난리를 쳐 고정적으로 나가는 식비의 개수까지 줄여주었는데, 자신이 매일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캘린더에 표시해서 매달 유리를 괴롭혀왔다. 심지어 유리가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그냥 제 돈 드릴게요'라고 이야기했더니 넙죽 자신의 계좌번호를 보내기도 해, 뭇 사원들의 경악을 사기도 했다. 이 ACB대리는 우리 또래 직원 사이에서 꽤 유명인사인데, 남자 직원들이 지나가면 먼저 인사할 뿐만 아니라 농담도 인사말도 넙죽 건네면서 여자 직원들, 특히 사원급인 직원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도 아래 위로 흘겨보고 쌩하니 지나가거나, 지나갈 공간이 없는 엘리베이터에 있다 하더라도 '네가 뭔데 나한테 말을 걸어'라는 눈빛으로 상대를 흘겨보았기에 우리 또래 직원들끼리는 '저 대리 여성 혐오하나 봐'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아무튼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ACB 대리가 유리에게 식수 문제로 메신저를 보내왔다. 유리는 평소처럼 친절, 또 친절하게 그의 질문에 응대해 주었는데, 결과적으로 '네가 손해 볼 일이 아니다'라는 내용이었음에도 그 대리는 자신의 말에 '그렇게 해 주겠다'라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아 굉장히 화가 났었나 보다. 유리의 응대 과정에서, 'CB대리님께서~'라는 부분을 트집 잡아 유리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가 유리에게 대뜸 던진 말은,
"야, 내가 니 친구냐? 내가 니 친구냐고. 어디서 CB 대리님이래? 성 까지 붙여서 ACB 대리님이라고 불러."였다.
대뜸 반말과 성질을 듣게 된 유리가 침착하게 '대리님, 지금 이렇게 저한테 막말하시는 게 옳은 행동이에요?'라고 반문하자 그는 더 발끈하며 대답했는데, 그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와, 이거 미친 거 아냐? 야,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아~ 성까지 똑바로 붙여서 A. C. B. 대리님이라고 부르라고!"
정작 본인은 사원급에게도 존칭을 쓰라는 사내 규칙을 어기고 있는 것을 알았을까? 결국 자기 할 말과 화풀이만 잔뜩 마친 ACB 대리가 전화를 끊자, 유리는 수치심에 총무팀 과장님과 인사팀장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 과정에서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는 유리를 보고 인사팀장은 그 대리의 팀장에게 연락하여 그 대리에 대해 사실 확인을 지시했는데, 인사팀장이 직접 연락했다는 데에 ACB 대리는 식겁했었나 보다. 다음날 바로 후다닥 오해를 풀고 싶다며 연락을 했는데, 당사자인 유리가 아닌 인사팀장과 총무파트의 과장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결국 면담이 진행됐으나 ACB 대리는 끝까지 유리에게 한 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면담을 진행한 인사팀장이 유리에게 '내가 잘 이야기했으니 별로 신경 쓰지 말라'라고 이야기했는데, 당사자가 괜찮지 않은데 왜 대리 사과를 받아와 본인이 해결했다고 생색을 내는 꼴이 정말 우스웠다. 유리도 항의해 봐야 더 이상 진행될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체념했다. 커피 한 잔을 얻어마시며 ACB 대리의 샤바샤바를 듣고 와 어깨가 한껏 부풀어진, 인사팀장의 위치가 이 정도지!라는 거만함을 충족시킨 인사팀장의 힐링타임으로 이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마무리? 정말 인사팀장이 마무리를 잘했다면 그 이후로 다시는 ACB 대리의 난동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유리의 수난시대는 본격적인 순풍을 맞이하여 '유리호 수난 대 항해'의 시작이 되었다. 선원은 아무도 없는, 선장 유리 혼자만의 외롭고도 끔찍한 대 항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