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수 직장에서 '여'직원으로 살아남기(3)

자고로 '응대'는 '여'직원이 해야 제 맛이지!

by 연느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는, 꽤나 전통 있는 중소기업이다. 고집 있는 경영방식을 유지해 와서 그런지 상당한 보수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데, 뭐 나이 있으신 경영진분들이야 그렇다 칠 수 있어도 나이가 많지 않은 관리자급 분들의 보수적인 마인드는 어디서 굴러들어 와 박혔는지 모르겠다. 세뇌가 된 걸까, 아니면 영화 '겟 아웃'처럼 어디선가 80대의 뇌를 이식받아온 것일까?

두 번에 걸쳐 쓴 우리 팀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것은 비단 나와 유리만 느끼는 답답함이 아니었다. 나의 입사 동기인 CS 부서의 지민이의 이야기는 항상 '꿀빡' 그 자체인데, 지민이 팀 부서장의 상상 이상의 빻은 언행들이 굉장히 빵 터지게 만들면서 빡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부서의 부서장이나 대리는 공교롭게도 둘 다 남자인데, 서로 다투듯 어메이징 한 어록을 남기기 바빠보였다. 특히 대리는 내가 있는 앞에서 교육 담당자에게 살을 빼라고 잔소리를 했는데, 내가 경악하며 싫은 소리를 하자 당황하며 해명한 다는 말이 이러했다.

"미연 씨가 못 봐서 그래. 얘가 날씬했을 때랑 지금이랑 교육할 때 수강자들 집중도가 다르다니까?"

교육 담당자 직원은 뚱뚱한 체형이 절대 아니었기에, 나는 더더욱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는 너나 수염 깎고 살 빼시는 게 어떠시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엄연히 '성희롱'임은 언젠가 내가 노동청을 통해 알려주겠노라며 이를 갈았다.

어느 날 지민이가 급하게 자리를 비워야 했을 때가 있었다. 오후 반차와 다음날 연차까지 쓴 후 지민이가 부서원들에게 본인 업무에 대한 인수인계를 해 주고 있었는데, 그 업무 중 하나가 CS 응대였다. 하필 교육담당자였던 동료까지 출장을 가 있었기에, CS 응대를 할 만한 사람이 부서장과 대리뿐이었다. 지민이가 대리에게 "제 전화 돌려받아 주세요, 대리님!"이라고 말하자마자 갑자기 대리가 성질을 냈는데, 자기는 전화 응대가 너무 싫다고 그걸 왜 자기가 해야 되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CS 부서인데 CS 응대가 싫다는 파격적인 발언! 지민이가 황당함을 오롯이 느끼기도 전에 그 광경을 본 부서장이 점잖게, 솔로몬처럼 나섰다고 한다.

"지민 씨, 4층에 유리 씨 있지? 유리 씨한테 지민 씨 전화 돌려놓고 받아달라 그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고 하니, 유리가 우리 팀으로 부서이동을 하기 전 3층의 타 부서에 있을 때, CS 담당자가 자리에 없으면 모든 전화를 유리에게 돌려놓고 유리가 응대하게 했다고 한다. CS 부서에 분. 명. 히. 사람이 있음에도, 그것도 건장한(?) 남성 직원이 둘이나 있음에도 말이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에, 부서장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고 한다.

"원래 고객 응대는 여자가 하는 게 맞아요."

너무 빻은 말을 뒤로하고, 이제 인사팀이 된 유리에게 어떻게 이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지민인 내게 SOS를 청했고, 아니나 다를까 이 꿀빡스러운 이야기에 빵 터진 나는 끅끅 대며 유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따 지민이가 올라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절대 지민이의 뜻이 아니며, 너는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거절하면 된다고. 물론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몰려오기 전까지, 지민이도 이야기를 질질 끌며 내려가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특히 인사팀장)이 다가와 물어보면 그제야 곤란하다는 듯 상황을 설명할 것이라고.

지민의 작전은 훌륭하게 통했다. 유리의 자리 앞에서 몸을 베베 꼬며 곤란하다는 듯 사정하는 지민의 모습을 보고, 다른 층의 젊은 '여'직원이 눈에 띄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인사팀장은 곧바로 유리의 자리로 날아갔으며, 지민이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극대 노하며 CS 부서장에게 연락하여 무슨 짓이냐는 폭언을 날렸다. 자리로 돌아간 지민에게 부서장은 화를 애써 참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인사팀이 하는 당직 제도도 그럼 서지 않겠다고. 당직은 인사팀이 정한 게 아니라 사장의 직접 지시이고, 본인이 당직 설 차례에 만만한 어린 직원들에게 대신 서 달라고 하며 당직을 서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지민이와 언젠가 이 부서장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있다. 나이도 어린 그는 어쩌다가 이렇게 꼰대가 되어 미쳐버렸을까? 정말 태어날 때부터 80대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건지, 아니면 이 회사에 적응하여 오래 다니면 자연스럽게 꼰대가 되는 건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절대 이 회사에 오래 다니지 말자는 결론을 내며 몸을 떨었다.

응대와 접대, 그리고 본인의 지식을 뽐내는 강연에서도 여성 직원들은 '여자'라는 젠더에 갇혀있고 한정되어있다. 앞에서 강연하는 애가 살이 쪄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고객 응대를 하는 건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말도, 손님이 왔을 때 접대하는 것도 막내인 남자 직원이 있더라도 여자 직원이 해야 한다는 시선도 모두 오롯이 여자 직원들이 감당해내야 한다. 그것뿐인가? 치마를 안 입고 다닌다고, 안경을 쓰고 다닌다고,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을 받지 않아 본 여자 직원은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머리도 제대로 빗지도 않고, 수염을 제대로 밀지도 않고, 같은 옷을 며칠이나 온 남자 직원들은 전혀 지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 직원들은, 언제든 자신들 혹은 손님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야 할 존재이기에 나노 단위로 지적을 받고 핀잔을 듣는다. 심지어 그들이 말하는 '완벽한' 풀메이크업과 고급 정장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여자 직원의 뒤에서, 그들은 '회사 분위기에 맞지 않게 화려하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여자 직원들을 같이 일 하는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이상, 이런 성 차별은 계속될 테지만 이 회사는 향후 10년이 지나도 그런 차별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성희롱 예방법이며 직장 내 차별 금지법이 생기면 뭐하나, 슬쩍 던져놓고 '앗, 요즘 이런 말 하면 잡혀가지? 미안 미안~'하고 놀리듯 말하는 작자부터가 인사팀장인 곳이다.


참, 잠깐 유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지민의 이야기를 듣고 유리에게 그동안 왜 그 전화를 네가 응대하고 자빠졌(!) 었냐는 나의 질문에 유리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회사에서 막내인 데다가 워낙 어릴 때 입사해서 시키면 다 해야 되는 줄 알았다고. 심지어 입사 1~2년 차에는 연차를 써도 되는지 모르고 눈치를 보다가 최소 연차 소진자로 연말에 불명예스러운 상까지 받았었다고 했다. 이토록 순하고 착하고 모든 사람들이 귀여워하고 좋아하는 유리의 수난시대가 펼쳐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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