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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유 Jun 16. 2024

학교를 나왔다. 나는 무엇을 했을까?

놀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후회 없이 놀았다.

학교를 나오고 나니 친구들이 꼭 했던 말이 있다.

"늦게까지 잘 수 있어서 부럽다 진짜..."

"맨날 노는 거 아니야?"


나는 홈스쿨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그렇지는 않다고 항변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기를 몇 번 경험하고서는 반박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걔네들이 한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고백하건대, 내 유소년기의 대부분은 논 기억뿐이다. 나름 다채롭게 놀았던 것 같다. 일단 나는 뭔가 만드는 걸 무척 좋아했다. 열 살 쯤이었을까? 아빠 손재주가 꽤 좋은 편이라 동네에서 공사하고 버린 합판 같은 걸 주워다가 조각배를 만든 적이 있다. 형태를 잡고 구멍을 뚫어 실을 연결하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양초로 방수 작업을 했다. 아빠가 퇴근하고 난 뒤부터 함께 만들다가 잠들고, 그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나서 다시 만들었던 걸로 기억한다.완성하고 나서는 물안개 낀 아침에 집 앞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물이 새는 곳은 없을까? 잘 뜰까? 긴장되는 마음으로 배를 물가에 띄웠다.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이 외에도 나는 플라스크, 비커, 알코올램프와 이런저런 실험용품을 가지고 놀았다. 그 당시 구독하던 과학 잡지에서 석면의 위험성을 읽었던 터라 석면 삼발이를 보며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싶었으나,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5월이면 길가를 돌아다니다 담장 밑 떨어진 장미 꽃잎을 주워서 지시약을 만들었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살아있는 장미에서 꽃잎을 뗀 적도 있다. 그렇게 조심스레 시험관에 옮겨 담고는, 이것저것 주워다 시험을 몇 번 한 후에는 잊어버리곤 했다. 며칠 아니 몇 주쯤 지나서 악취가 나는 바람에 코를 틀어막고 버렸다.


한 번은 집에 구비해 놓은 실험도구로, 당시 유행하던 빈대가족 만화 시리즈에 나온 크레파스 녹여서 재활용하기를 시도한 적 있다. 그때 작은 찻잔 같은 도가니 하나를 날려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좁았던 방은 녹은 크레파스가 튀어 굳은 자국으로 범벅되고, 그 도가니는 다시 쓰지 못할 정도가 되어 어찌나 슬펐던지...


이 외에도 레고 조립, 잡지 부록에 있는 종이 로봇 만들기, 마을문고에 가서 하루종일 만화책 보기, 집에 있는 만화책, 위인전, 과학잡지와 건강요법 사례집 읽기, 코엑스에서 열리는 박람회 가기, 혼자 동네 탐방하기. 오전에는 혼자 놀고 오후에는 학교 친구들을 불러서 놀았다. 다시 돌이켜보아도 그만큼 놀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열심히 놀면서 내 몸에는 한 가지가 익혀졌다. 무해하게 즐기는 법이다. 내 마음과 생각을 상하게 하지 않고, 즐거움을 얻으면서도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는 방법. 더없이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법을 배웠다. 나이가 듦에 따라 반복되는 일상으로 매너리즘에 빠지고 마는 삶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건, 잔잔한 유쾌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잘 논다. 혼자 고궁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헌책방을 둘러보거나. 약간은 허기진 상태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서점을 가서 요즘은 무슨 책이 있나 살펴보고, 그 책에서 말하는 내용 몇 가지를 훑어본다. 점심시간의 잠깐을 이용해서 코인노래방을 가 두 곡을 부르고 온다. 시간이 맞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밥을 먹는다. 걸으면서 서로 사는 이야기를, 숙성시키고 있는 고민을, 요즘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을 나눈다. 때로는 집으로 초대해서 고기를 구워 먹고 모닥불을 피운다. 지지난주에는 군대에서 만난 친구를, 지난주에는 한국으로 여행 온 필리핀 친구와 그의 가족을 초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살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시행착오들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이 글을 읽은 누군가는 노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물론 맞는 말이다.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만이 공부의 전부는 아닐터다. 우리에겐 살아남기 위함뿐이 아닌,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도 필요하다.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난 인간이 찾는 것을 요약하면 두 가지다. 의미와 재미. 잘 노는 것은 이 중 절반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니 중요하지 않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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