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3색 가족의 속초 여행기
178, 173, 168.
내 가족 세 명의 키다. 조금 특이한 점은 앞에서부터 나, 중3 딸, 그리고 토토로 비주얼을 한 남편 순이라는 것이다. 셋은 키대로 쪼로로 속초 해변을 걷는다. 내가 앞서면 딸은 내 옆에 붙는다. 몇 발 뒤에 걷던 토토로는 “넌 왜 엄마한테만 가냐?”며 질투하면서도 이 집 여자들 키가 자신보다 큰 것이 만족스럽다. 유전자를 개량했다는 무의식적인 뿌듯함일지 생각하는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오빠~ 나랑 다니면 아주 있어 보이는 거 알지?” 나는 갑자기 오빠라고 부른 것도 모자라 그가 평소에 무서워하는 애교까지 떤다.
“뭔 소리야?” 정색하는 건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그가 묻는다.
“나처럼 키 크고 젊어 보이는 여자가 함께 다니면, 사람들은 남자가 엄청 능력 있는 줄 알거든. 게다가 내가 좀 동안이잖아~” 나는 허튼 말을 진심으로 한다.
“이 아줌마가 이젠 대놓고 나를 디스하네.” 경상도 남편은 기분이 나쁜 데 좋기도 하다.
연휴를 맞아 셋은 속초로 갔다. 삼일 내내 붙어 있는 일은 삼인삼색 가족에게 매우 도전적인 일이기에 설렘 없이 약간은 의례적으로 떠난다. 셋이 함께하는 시간은 일주일 동안 두 시간 남짓이니 가족색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다. 따로국밥 같은 이들이 함께 할 때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음식이다. 나는 기름 적은 야채, 딸은 해산물 전혀 없는 담백한 국수, 남편은 고기와 매운 국물이 주식이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먹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아이가 큰 후로는 각자 먹고 싶은 것을 흩어져서 먹고 다시 모이는 것도 가능하지만 여행의 목적에는 어긋난다는 문제가 있어 지양한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오전 10시에 속초에 도착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교동짬뽕 본점을 찾았다. 중국 음식 먹기엔 다소 이른 것 같지만 나머지 둘이 좋아하니 잠자코 들어간다. 운전하면서 혼자 산딸기와 오이를 먹어서 다행이다. 고정 메뉴를 주문한다. 딸은 짜장, 남편은 짬뽕 아주 맵게, 탕수육은 무조건. 나는 있을 리 없는 샐러드를 허공에 외친다. 중국 음식집에서 샐러드를 시키냐며 남편은 타박한다. 예능을 다큐로 받는 흔한 사건이 발생했기에 잠시 짜증이 먼지처럼 떠다니다 가라앉는다. 딸의 짜장은 지금까지 먹은 것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남편의 짬뽕은 기대보다 별로라는 혹평을 받는다. 나는 탕수육 양념 속 야채와 남편의 매운 짬뽕 속 야채를 파먹고, 딸의 짜장면을 한 입 먹는다. 별로 먹고 싶지 않던 음식을 먹고 배가 불러서 조금은 억울하다.
체크인까지 다섯 시간이나 남았다. 비 내리고 쌀쌀한 날이라 실내에서 놀 수 있는 곳을 검색한다. 해변에 있는 앙젤루스 소원 테마파크로 들어간다. 매운 음식을 먹은 남편은 입장하자마자 황급히 화장실로 사라지고, 흥미 없어 보이던 중학생은 소원을 빈다는 다소 유치할 수 있는 컨셉에 묘하게 빠져든다. 딸이 세 개의 회전판을 차례로 돌려 문장을 완성하는 전시물 앞에 섰다. “내년 어린이날에는”, “기대도 안 했는데”, “공돈 생김!!!”이라는 문장이 완성되자 얼굴에 예쁜 행복이 번진다. 내 차례엔 “간절히 바라면”, “비 오는 날”, “아무 일 없음”이란다. 우리 셋이 여행에서 티격태격 안 하면 행운이긴 하다. 중학생은 계속 말한다. “엄마, 아빠, 나 올해 전~혀 기대 안 할 테니까, 공돈 생기면 좋겠어요, 네?”
이번엔 아바이 벽화마을로 향한다. 벽화에 아무 관심 없는 둘은 내가 길을 못 찾자, 카페로 쏙 들어간다. 나는 혼자 동네 한 바퀴를 빠르게 돈다. 새 아파트 바로 옆 낡은 담벼락에 반가운 벽화들이 있다. 파파스머프와 스머패티, 아톰, 스파이더맨, 무민, 토토로, 베티붑, 꼬마자동차 붕붕. 어린 시절에 아무 걱정 없이 보던 만화들을 잠시 추억하니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다. 카페로 갔더니 “엄마, 아빠가 빵 진짜 많이 샀어요!”라고 딸이 이른다. 마음 넉넉한 토토로는 실로 놀라운 양의 빵을 구매했다. 짬뽕과 탕수육은 모두 화장실에서 그와 이별한 모양이다. 밥을 안 먹은 자에게도 다소 많아 보이는 양에 나는 잠시 흠칫한다. ‘잔소리 금지.’ 바깥 바다 풍경에 잠시 마음을 내어주었다가 책을 꺼낸다. 딸은 인스타, 남편은 유튜브로 사라진다.
드디어 체크인 시간이다. 언제나 피곤한 토토로는 숙소 도착 후 5분 만에 잠들고, 중학생은 인스타 영상에 빠진다. 나는 잽싸게 캠핑 의자와 책과 이어폰을 챙겨 바다로 나간다. 바람이 차서 햇살 한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젊은 여자 둘이 지나가다가 바로 내 앞에서 한참 동안 사진을 찍는다. 분명 바다 뷰에 앉았는데 엉덩이 뷰가 되고 말았다. 책으로 시선을 돌리자 하필 그들은 내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책 읽기는 틀렸다. 숙소로 돌아가 짐을 놓고 다시 해변으로 향한다. 눈에 보이는 해안선 끝에 ‘바다향기로’라는 낭만적인 산책로가 펼쳐진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느릿느릿 산책하는 가족들 사이로 나는 홀로 꼿꼿한 자세로 성큼성큼 걷는다. 외옹치항까지 갔다가 높은 L리조트 계단 길로 올라가는 풍경은 정말 혼자 보기에 아깝다. 누워있는 둘을 끌고 나올 음모를 조용히 계획한다.
셋이 함께 저녁 먹으러 L리조트 뷔페로 가기로 했다. 둘을 끌고 ‘바다향기로’ 계단을 오른다. 토토로는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중학생은 감성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다. 그래도 나는 이 풍경 속에 셋이 함께인 것이 좋아서 둘의 사진을 찍는다. 힘든 길 올라온 남편은 딸을 꼭 껴안고 사진 찍는 그 순간이 행복하다. 뷔페에서 중학생은 스파게티와 빵, 토토로는 고기와 회와 또 고기, 나는 회와 샐러드와 빵을 흡입한다. 각자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는 이번 여행이 무탈했음에 흐뭇하다.
해 저무는 풍경 속에 해변으로 걸어 내려온다. 나는 딸과 꼭 껴안고 걸어가고 남편은 질투한다. 딸이 곧 불편하다며 투덜댄다. 놓아주니 이번엔 다시 안으란다. 나는 그 불편한 대열에 토토로도 끌어들인다. “이거 놔, 왜 이래! 불편하단 말이야!” 경상도 토토로는 저만치 달아난다. 셋은 불편하게 엉겨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며 함께 웃는다. 이 한순간을 위해서였다. 해 지는 풍경, 파도 소리, 발밑에 흩어지는 모래, 머리를 흩날리는 바람, 그리고 웃음.
우리는 샐러드와 담백한 국수와 매운 국물을 양보하고 타협할 것이다. 키대로 쪼로로 다닐 것이다. 나는 걷고 중학생은 인스타를 하고 토토로는 먹다가 잠들 것이다. 가족은 웃을 찰나를 위해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서로를 참아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