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줄이게 된 계기

맨정신에 술맛을 생각하며

by 능구의 시선

1. 첫 번째 턴

"사장님, 후레쉬 하나 주세요"


술집에 가면 우선 소주를 한병 시킵니다. 술이 차가울수록 좋습니다. 병을 손에 쥐고 11시 - 5시 - 12시 방향으로 흔들어 회오리를 만든 뒤, 회오리가 채 사라지기 전에 뚜껑을 땁니다. 함께 자리한 이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마지막에 내 잔을 받습니다.


짠-


술자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술잔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혀 빈속에 소주 한 모금을 내려주고요. 몸은 본격적으로 알코올을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입안에 약간의 술향이 남아 있을 때 당근이나 오이로 입가심합니다. 술자리의 첫 번째 턴이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다음 턴을 준비합니다.



2. 안주

소주를 좋아하니 소주에 한정해 얘기하겠습니다. 소주는 안주 한 점에 한 잔 마시는 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젓가락에 집히는 크기의 것들이 안주 삼기에 좋습니다. 저는 특히 계절 별 제철회를 선호합니다. 여름에는 민어회, 가을에는 고등어회, 겨울에는 숭어나 대방어 혹은 생굴까지. 계절이 애매하다면 참치를 선택하면 됩니다. 황새치나 눈다랑어보다는 참다랑어가 단연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배꼽살과 대뱃살이 기름기가 있어 맛있지만, 숙성한 적신(아카미)이라면 산미가 올라와 더 별미일 때도 있습니다. 초장이나 김을 곁들이는 것보다는 기름장으로 시작해 간장과 와사비 조합으로 넘어가는 게 깔끔합니다.


그 외의 좋은 안주로는 돼지 소금구이, 보쌈/족발, 닭발이나 똥집, 곱창과 막창, 두부김치, 마라샹궈 등이 있죠. 뭘 먹을지 고민될 때는 우선 그날 컨디션을 따져봅니다. 오늘은 자극적인 것과 담백한 것 중 어떤 컨셉인지 정하고, 기름진 음식이 잘 들어갈지도 생각해 봅니다. 이후 조리법에 따라 날것, 구이, 찜, 볶음, 지짐, 무침, 데침, 조림, 튀김, 탕 등을 선택하고 마지막에 주재료를 고릅니다. 그러면 최소한 안주 선정에 실패할 일은 없습니다.



3. 술맛

술맛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먼저 술 종류에 따른 객관적인 맛이 있겠습니다. 대중적인 소주는 대개 희석식 소주입니다. 고순도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섞어 만듭니다. 브랜드마다 블렌딩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향과 목 넘김, 끝맛이 조금씩 다릅니다. 저는 많은 소주 중에 참이슬 후레쉬를 좋아합니다. 약간 달큼하면서 부드러운 편이거든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술맛을 논하기엔 부족합니다.

술은 먹는 상황에 따라 다른 맛으로 느껴지니까요.


가장 술맛이 좋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일단 저는 터울 없이 지낼 수 있는 편안한 사람 서너 명이 모이는 게 좋습니다. 이미 몇 번 가봐서 살짝 정이 들어버린 술집에 매번 앉던 자리면 더 좋고요. 대화 주제는 추억 얘기, 지금 사는 얘기, 나중에 하고 싶은 것들까지 골고루. 주변이 고요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아서 우리 얘기가 여러 소리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는 정도. 조명은 따듯한 전구색에 천장 높이가 적당해 아늑한 분위기를 선호합니다. 술 마시는 내내 춥다거나 덥다거나 불평할 일이 없는 온도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주 종류가 아주 많을 필요는 없지만, 술자리의 기승전결 혹은 기서결을 받쳐줄 수 있게 너무 단조롭지는 않아야 합니다.


이런 디테일한 요소들이 술맛을 결정합니다.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대체로 편안한 사람과 함께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에서 술을 마실 때 술맛이 배가 됩니다. 몇 잔 넘기다 보면 자세도 흐트러지고 목소리도 커지겠죠. 그런 취해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의식하거나 억제할 필요가 없는 자리, 인원 모두 만취하더라도 주사가 우악스럽지 않아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자리, 그러니까 함께하는 순간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술자리에서의 술맛이 가장 좋습니다.



4. 절주

실컷 술 얘기를 했습니다. 많이 마셨을 때는 주에 4-5회까지 술자리를 가졌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술을 조금 멀리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입니다. 서른이 되면서 이루고 싶은 것들이 더 생겼습니다. 그 규모도 예전보다 커져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요. 술을 마실 때마다 그 시간에 할 수 있었을 일들이 생각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쌓이니 죄책감이 들어 술맛도 떨어졌습니다. 술맛을 최대로 즐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는 '지금 큰 고민거리가 없는 상황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연히 술 마시는 횟수가 줄어들고 그 시간은 미래를 위해 쓰게 됐습니다. 금요일 밤인데도 이렇게 책상에 앉아 공부하다 글을 끄적이고 있네요.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나중에 좋은 술맛을 느끼기 위해 절주합니다.







커버 사진 출처: Unsplash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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