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일 개나줘버려
우린 10월 31일이 결혼기념일이다.
결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증거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으면 남편님께서 언제 도망갈지 모른단 생각에 소소하게라도 기념사진을 한 컷 남기기로 했었다. 날 좋은 가을날 인터넷으로 하얀 원피스를 사고 부케 대신 꽃다발 하나를 주문해서 우리끼리 조촐하지만 의미 있게 결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날이 바로 핼러윈데이 10월 31일이다.
아이를 낳기 전엔 핼러윈데이라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호박들이 떠다니는 날이라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호박이 저주를 내린 것일까. 우린 결혼기념일만 되면 호박 터지게 싸워댔다.
난 연애시절에도 밸런타인데이 같은 연인들 데이는 그다지 잘 챙기는 편이 아니었다. 무슨 날이든 술이나 같이 한잔 마시면 그걸로 하루 기쁘게 보낼 수 있는 초 단순하고 착한 여자였다. 그런데 남편은 이 착한 여자의 마음도 몰라주고 부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걸 그토록 경기를 내며 싫어한다. 내가 무슨 큰 선물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꽃 한 다발이나 편지 한 통만 써주면 된다고 십 년이 넘어가도록 외쳐대고 개처럼 짖어도 봤지만 남편은 매년 변함없이 잊어버리거나 얼렁뚱땅 넘어가버렸다.
신기하게도 결혼기념일 날 만 되면 (남편 혼자) 저주를 받았나 싶을 정도로 남편에게 항상 일이 생겼다. 야근은 기본이었고 그날따라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사건사고가 나거나 몸이 아프거나 이도 저도 아닐 땐 힘들고 슬픈 일이 생겨서 기념일까지 챙길 정신이 없었다며 매년 핑계를 댔다. 난 남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15년 차인 결혼생활을 아직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인지 그날 하루 챙겨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건지 매년 그날만 되면 가만있는 호박이 터져버릴 만큼 우린 싸워댔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그나마 나을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낱같은 기대를 또 하게 되고 결국 매해 우리의 결혼기념일 날은 전쟁기념의 날로 바뀌어 버리곤 했다.
올해도 역시 핼러윈데이이자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제주에서 보내는 첫 결혼기념일다. 핼러윈 장식이 여기저기 눈에 띄면서부터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는 생각과 함께 올해도 매해 그랬듯 전쟁기념일을 만들어야 하는 건지 마음이 착잡해졌다.
제주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것들을 버리고 바꾸며 살고 있다. 제주가 내 생각을 바꿔준 것인지 아니면 세월이 내 생각을 바꿔준 것인지 기념일에 대한 생각이 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꼭 어떤 기념일이 아니어도 매일을 소중하게 감사하게 보내려 노력 중인데 어떤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기념을 해야 하는 건지 이젠 더 이상 ‘기념일’이란 단어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나는 어쩌면 기념일 날의 진정한 의미보단 SNS에 어여쁜 사진이라도 올리면서 행복한 기념일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정말 그날이 소중하다면 남편에게 무언갈 바라기 전에 소중한 그날을 남편과 같이 감사하면서 기쁘게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인데 남들과 비교하며 보여주고 드러내주기만을 바라왔던 것 같다.
더 이상 결혼기념일을 전쟁기념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졌다. 마음 심란하게 만들기만 했던 핼러윈데이 호박 장식들을 올해엔 일절 하지 않고 10월이지만 일찌감치 볼 때마다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먼저 걸어놨다.
그리고 결혼기념일 날 하고 싶은걸 올해엔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꽃다발 같은 선물도 진짜 받고 싶은 마음보단 몇 해 동안의 싸움 때문에 나의 오기나 집착이 돼버린 것 같다고. 아마도 그로 인해 남편에겐 더더욱 하기 싫은 일이 돼버린걸 이젠 이해할 수가 있다고 앞으론 의미 없는 신경전은 그만하자고 얘기를 나눴다. 기념일 얘기에 처음엔 남편에게서 약간의 긴장감이 보였으나 솔직히 털어놓는 내 얘기에 공감하고 미안해했다. 그제야 우린 기념일이란 단어에서 벗어나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스스로 기념일이란 저주를 만들어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호박만 봐도 화가 나는 호박 기념일에 목숨 걸지 않고 우리만의 결혼기념일을 다시 한 해 한 해 쌓아가려 한다. 원하는 게 있으면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행동하자. 남편은 올해 결혼기념일 날 야근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반차를 냈고 우리 가족 모두 좋아하는 아웃백을 예약했다. 아웃백에서 먹을 맛있는 빵과 수프, 기분 좋을 저녁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