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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bi미경 Oct 28. 2023

절대 때려치울 수 없는 것 - 맥주

맥주야 널 너무 사랑해


오후 6시 정각. 수혈의 시간이 돌아왔다. 냉장고를 열어 김이 서린 채 잘 익어있는 맥주 한 캔을 꺼낸다. 딸깍! 깔 때마다 경쾌한 이소리.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켠다.

하아- 세상만사 걱정이 이 한 모금과 함께 내려가는 것 같다.


맥주는 내 삶에 언제 어디서든 함께했다. 아이를 낳기 전 회사를 다닐 땐 1차론 주로 삼겹살에 소주였지만 난 이상하게도 소주를 먹고는 취기가 잘 오르지 않고 2차로 맥주로 목을 좀 축여줘야 서서히 취기도 오르고 말발도 오르곤 했다. 회사 상사분들은 맥주만 마시면 동공이 살포시 풀려 헛소리를 툭툭 내뱉는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즐거워했다.

그 시절 무섭기로 소문난 상무님과 함께 했던 어느 회식자리에서 내 자리는 하필 상무님 바로 앞자리였다. 자리배치를 한 대리님을 속으로 욕하면서 호랑이 상무님 앞에 앉아있으려니 목이 계속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연신 맥주잔을 비워댔다. 그게 화근이었다. 혼자 맥주병을 쌓아가면 마시던 나에게 상무님은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묻기 시작하셨고 맥주의 흥에 취한 나는 대답했다.


“상무님이.. 호랑이같이 무서워서 고민이에요!!”


순식간에 회식자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미 맥주를 마신 난 고삐가 풀려버렸고 혼자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상무님, 좀 웃으시면 안되용? 전 정말 상무님이 무서워서 결재받으러 갈 때마다 오줌이 마려울 정도로 긴장이 된다고요! 지금도 맥주를 하도 마셔서 오줌 마려워 죽겠는데 상무님한테 혼날까 봐 화장실도 못 가고 참고 있잖아요!!”


상무님은..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셨다. 그 장면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난다. 옆에 있던 대리님이 나를 화장실로 끌고 가셨고 난 시원하게 볼일을 본다음 상무님과 노래방을 가서 함께 브루스를 췄다. 그날 내 입방정 이후로 상무님은 회식 때마다 나를 부르셨고 나는 언제나 상무님 앞자리에 배정되어 그 해를 보냈다. 그 해 나는 인사고과 최고등급인 S를 받았다. 누가 뭐래도 뿌듯했다.


맥주를 그리 마셔대던 나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내 기억력에 언제나 감탄했다. 기특하게도 비밀번호까진 정말 잘 따고 들어오는데 그다음이 항상 문제였다. 

꼭 신발을 안고 자는 것이다. 집에 멀쩡하게 들어와 신발을 고이 벗은 나는 그대로 누워서 신발을 안고 잤다. 겨울에는 더 포근했다. 부츠를 안고 자기 때문이다. 

이 술버릇은 지금의 남편인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하면서부터 다행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신발을 차곡차곡 쌓아 잠을 자려할 때마다 남자 친구는 그때까지도 말만 살아서 떠드는 나를 겨우 끌고 들어와 침대에 눕혀주었다. 이때 버릇을 고치지 않았으면 난 아마 지금도 술 마시다가 현관으로 기어가 신발을 꺼내 안고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시절 부츠는 참 따뜻했다.


육아가 시작되면서부터 맥주는 본격적으로 내 삶의 오아시스가 되었다.

하루종일 아이에게 치이면서 몇 번이나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내 속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시원한 맥주 한 캔이었다. 적절한 알콜도수로 뒤끝도 없고 배부른 포만감까지 잔뜩 안겨주는 맥주는 내 마음에도 여유라는 포만감을 잔뜩 안겨준다. 눈에 거슬리던 아이의 행동도 맥주 한 캔 들이키고 나면 세상 너그러워지고 그날의 어떤 고민도 맥주와 함께라면 어려울게 없어진다.

마시는 맥주양에 비해 살이 찌지 않는다는 말도 듣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이미 자리 잡은 뱃살가족들은 내 몸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도 했고 저녁엔 탄수화물을 되도록 먹지 않고 있다.

밥으로 배가 부르면 맥주의 참맛을 즐길 수 없기 때문에 난 밥대신 맥주를 깐다. 맥주를 위해 저녁밥을 포기했더니 그 덕에 몸무게를 유지시켜주고 있다. 일석이조 상부상조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훗.


‘술이라면 내가 20년 동안 그 무엇보다도 가장 꾸준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해 온 게 아닌가. 반평생에 걸쳐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도, 가장 많이 몸속으로 쏟아부은 것도 술이었다.-아무튼 술-’


김혼비 작가의 책에 나오는 이문장을 읽고 술잔을 내리치며 공감했다.

나 역시 반평생 맥주를 마셔온 열정만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맥주 한잔은 품고 갈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다. 건강도, 사랑도, 사람도 맥주 한잔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난이 밀려와도 자신감 뿜뿜이다. 맥주는 나를 쉬게 해주는 쉼표이자 하루의 마감을 기분 좋게 알려주는 마침표이다.

오늘도 난 맥주캔을 깐다. 추억 속 브루스가 생각난다. 오늘밤 남편과 함께 땡겨봐야겠다.

그대의 눈동자에 치얼스.


이정도 안주면 맥주 5캔정도는 올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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