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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bi미경 Oct 29. 2023

사교육 따위 때려치우다

아이의 20년 후가 궁금한가요


제주로 내려오기 전 아이를 낳고 키운 곳은 경기도 쪽 신도시였다. 서울 중심가도 아닌데 어찌나 사교육 열풍이 세던지. 평균 30대 중반의 엄마들은 모이기만 하면 교육얘기로 불을 뿜으며 토론과 열변을 토하기에 바빴다.


유치원 고민이 시작되던 아이가 5살이 되던 해 동네 엄마를 통해 놀이학교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영어유치원과 일반유치원의 장점들을 모아놓은 곳이라며 비싼 학비만큼 아이들의 케어와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곳이었다. 입학설명회 때 눈이 하트가 돼버렸던 나는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이곳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아이의 놀이학교생활은 시작되었다.

놀이학교의 반모임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가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명품백들을 들고 온 엄마들은 곱디고운 얼굴을 한채 서로의 재력을 은근히 뽐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엄마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우리 여기 놀이학교 보내는 정도면 이 동네에서 좀 사는 거 맞지요~? 오호호호호호”라고 하시는데 난 옆에 누가 들을까 부끄러워 어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서로 사는 곳을 소개할 때는 다들 이 동네에서 알만한 아파트들의 이름을 얘기했고 옆동네에서 전세로 살던 나는 내 소개타임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소개를 막 하려는 찰나 “어머 시율엄마 옆동네에서 오신다면서요. 어휴 빨리 이사하셔야겠다. 힘들어서 어떻게 다니시려고 호호호호호~” 하는 가디건 엄마의 이 말 한마디에 내 소개는 그렇게 넘어가 버렸고 나는 혼자 붉어진 얼굴로 명품 아닌 가방을 꼭 쥐고 돌아와야 했다.



놀이학교를 3년을 다녔다. 그새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들에게 동요되었다. 캐슬 이름이 붙은 아파트로 대출을 끌어 이사를 했고 최장할부로 좋은 차를 끌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한다는 사교육에도 휩쓸려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은 단연코 얘기할 수 있다. 내 인생 가장 후회되는 시절이었다.)


사교육은 끝이 없었다. 내 귀는 얇다 못해 아예 구멍만 뚫려있었다. 엄마들에 휩쓸려 많은 곳을 쫓아다녔다.

아이들을 과학수학 영재로 만들어준다는 영재학원. 문제는 내 딸은 영재가 아니었다는 것. 긴 수업시간은 아이를 신경질적으로 만들었고 다니기 싫었던 아이는 수업시간 동안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항의의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영재교육은 끝나버렸다.

요즘 아이들의 필수라는 영어학원. 이 역시 아이는 힘들어했다. 긴 시간 원어민선생님의 수업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아이는 점차 소심해졌다. 결국 때려치웠다.

수학은 하루라도 빨리 해야 한다는 말에 보냈던 수학학원. 긴 수업시간도 힘들어했지만 매일 6권이 넘는 문제집 숙제는 아이를 숨 쉴 틈이 없게 했다. 

그 후로도 피아노학원, 수영학원, 수학학원, 학습지, 문해력학원, 체조학원, 영어미술학원, 그림책학원, 보낸 곳들이 다 기억에 나지도 않는다. 그렇게 3년 동안 나는 돈과 시간과 내 아이의 에너지까지 날려버렸다.


아이는 싫으면 죽어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학원들도 한두 번 가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난 점차 내 아이에게 맞는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면서 사교육을 쫓아다니는 나에게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불안함을 놓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사교육 행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진짜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아이를 믿지 못하는 나를 걱정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엄마들을 따라다니며 시킨 사교육들은 교육만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모여 다니며 즐기는듯한 그 삶에 나도 껴있고 싶었고 학원을 핑계로 아이에게 해줄 건 다 해주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시작도 아직 해보지 않은 일들을 이미 못할 것이란 전재하에 불안감만 가득한 시선으로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쪽팔렸다.



아이가 7세가 되던 해 다니던 학원들을 다 때려치웠다. 좋아하는 미술학원만 다니면서 함께 책을 읽거나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무리에서 점차 빠져나왔다. 영어교육도 일체 시키지 않았다. 아이를 믿고 한 템포 늦더라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는 다정해졌고 나는 점점 더 나만의 교육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엄마들은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늦었어 언니. 이렇게 안 시키다가 초등학교 때 못 따라가면 어떡하려고 해. 우선 시켜봐야 애가 학습버릇이 드는 거니까 싫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시켜봐.”

내 자식 일인데 다들 걱정을 어찌나 해주던지. 같은 반 아이들이 영어학원이나 수학학원에서 받아오는 좋은 성적들을 친절히 알려주면서 더 늦으면 안 된다며 아이를 꼬셔서라도 사교육을 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라고 나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내 얇았던 귀는 어느새 단단하고 두껍게 새로 태어나 있었다. 난 전혀 불안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루종일 학원을 돌아다니는 그들의 아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엄마들과 아이교육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어느새 언쟁이 돼버리곤 했다. 어느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사교육 받지 않고 키운 언니딸과 남부럽지 않게 교육받으며 커갈 본인딸의 20년 후를 꼭 보고 싶다고. 명언이다. 나도 꼭 만나고 싶다.



사교육을 놓고 제주로 내려온 지 일 년 차가 되고 있다. 놀이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학원 레벨테스트를 받으며 치열한 경쟁 속에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고 있다. 지금 내 아이는 학원에 다니는 시간대신 많은 책들을 접하며 읽고 쓰고 그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매일을 쌓아가고 있다. 많아진 시간만큼 상상력도 풍부해지고 친구들과도 좋은 우정을 나누며 쓰기와 그리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다.

20년 후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가 모이고 모인 나날이 내 아이의 미래를 만들어줄 것은 확실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현재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가고 싶지 않다. 사교육 대신 책 한 권을 더 읽을 수 있고 하늘을 한번 더 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

앞으로 커갈 아이를 믿고, 그 곁에서 지켜봐 줄 나를 믿는다.



초2 시율양의 일기입니다. 액션 스릴 사랑 웃음의 장르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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