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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bi미경 Oct 31. 2023

아빠의 저주를 때려치우다

백마 탄 왕자님은 내가 돼줄게요


어린 시절 아빠는 무서웠다. 어린 시절뿐 아니라 아빠는 쭉 무서웠다. 언제나 화를 냈고 밥상을 뒤엎었으며 손찌검을 했고 바람을 피웠다. 난 아빠의 모든 점이 다 싫었지만 다 먹지도 않은 밥상을 뒤엎을 때가 제일 미웠다. 가만 보면 아빠는 혼자 밥그릇을 다 비울 때쯤에야 뒤집곤 했었다. 밥상을 엎을 때조차 이기적이었다. 성질이 나도 물건 같은 건 던지지 않았다. 다시 사야 하는 게 더 성질이 났던 것이다. 그 대신 언제나 맨손파이터였다. 먹고사느라 바빴던 엄마는 언제나 집을 비웠고 번번이 사업실패로 살림을 말아먹던 아빠의 파이터 대상은 언니와 내가 되곤 했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아빠와 정반대 되는 남자를 만나서 집을 탈출하는것었는데 그때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딸은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될 것이란 말이었다. 그건 마치 자라나는 새싹에게 니 앞날은 거지발싸개 같을 거야!! 라며 내리는 저주문처럼 느껴졌다. 망할 저주문이 어느 정도는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인지 난 만나는 놈들마다 다혈질에 허세만 가득한 아빠 미니미들을 만나곤 했다.



고등학교 때 만난 놈은 버스에서 우연히 나를 본 이후 너 없는 삶은 죽음뿐이라며 학교도 가지 않고 등하교하는 나를 쫓아다녔던 놈이었다.(그렇다. 고등학교땐 청순했다.) 그놈은 말로만 듣던 일진이었다.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봤던지 모범생 여학생과 문제아 남학생의 사랑얘기가 머릿속에 그려지던 난 그놈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만화처럼 그놈을 구제해 주고 싶었다. 결과적으론 그놈 따라 껌 씹으며 오토바이 탈뻔한 날 학교 선생님께서 구제해 주셨다. 

대학시절 만난 놈은 천하에 바람둥이였다. 그놈은 매일 벤치에 누워 사색을 했다. 삶이란 무엇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벤치에 누워 헛소리를 할 때마다 난 그놈이 테리우스 같았다. 내가 외로워도 슬퍼도 캔디가 되어서 테리우스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놈 쫓아다니다가 학과수업을 낙제를 받은 후 알고 보니 그놈 곁에는 이미 캔디가 3명 이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난 단물 쪽 빠진 캔디였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난 드디어 아빠와 정반대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3년을 만난 그 사람은 청담동에 거주하며 경기고와 K대학을 나온 전형적인 맞춤 신랑감이었다. 뿌듯했다. 얼굴은 좀 메주같이 생겼지만 성격도 온순하고 진지한 성격이라 뭐 하나 아빠랑 비슷한 점은 단 한 개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놈은 반전이 있는 놈이었다. 일산에 살던 날 태우러 온 그놈이 동네를 지나는데 어린아이 한 명이 차 앞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걸 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촌것들이 왜 이리 늦게 걸어”

와 씨알. 그놈은 나를 일산 촌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중간에 느껴졌던 그놈의 요상한 우월감이 단순히 내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던 날이었다. 그렇게 그 청담동 메주놈과의 연애도 막을 내려버렸다.



내 연애는 언제나 폭망이었다. 자존심 세고 즉흥적이고 가끔은 폭력적인 그런놈들에게서 왜 벗어나질 못하는지. 내 속에 뿌리 깊게 박혀버린 아빠라는 형체는 그 이상의 남자를 볼 수 있는 눈을 나에게 심어주질 않는 것 같았다. 내 무의식이든 뭐든 결국 아빠와 비슷한 남자에게 끌리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나를 탈출시켜 줄 남자를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지 않기로 했다. 무의식이든 유의식이든 매일 눈앞에서 마주하는 아빠의 존재부터 끊어내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아빠는 예상처럼 또다시 밥상을 엎을 기세였지만 난 그 밥상을 받아칠 기세로 완강하게 짐을 쌌다. 좁아도 천국 같은 원룸을 구했고 아빠가 떠오를만한 물건은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미래를 계획하며 나를 채워가는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 내가 바라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매일 되새기면서 나 또한 그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생활도 충실히 해나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뇌부터 장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아빠와는 정반대인 남편을 발견했고 나에게 관심 없던 그에게 오백번 대시를 하면서 어느 밤 그를 결국 덮쳐버렸다.

그와 함께하는 15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아빠라는 그림자를 그에게서 떠올리지 않고 있다. 간섭이 심했던 아빠조차 본인과 너무 다른 남편에게는 선을 지키려 했고 그 덕에 난 결혼 후 아빠와 적당히 거리가 있는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무의식은 무의식일 뿐이다. 잘못 박힌 무의식은 내가 반대로 뒤집어버리면 오히려 달게 쓰일 수 있다. 맨손파이터에게 자라나 폭망 한 연애로 청춘을 보냈지만 어쩌면 내가 커온 여러 경험덕에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나를 키울 수 있었으며 나에게 맞는 남자를 결국 채올 수 있었다.

저주가 풀리고 마법은 다가온다. 저주를 풀 수 있는 힘은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다.


아빠가 평생 해주지 않았던 것. 딸하고 놀아주기. 내딸은 실컷 즐기며 자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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