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학교에 아이를 3년 보내는 동안 점차 나는 뭔가 공허해졌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 교육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엄마들과의 모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점차 그 생활이 맞는 것인지 내가 진짜 나답게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계속 생겼다. 모임을 하고 온 날이면 그 공허함은 더 커졌고 아이 교육에 대한 엄마들의 논쟁을 듣고 온날이면 뭔지 모를 불안함과 심란함으로 찜찜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아이교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나를 채우고 싶었다. 아이엄마 역할도 좋고 한 남편의 와이프도 좋지만 그 안에 나는 없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이 시간 동안에 공부라도 하고 싶었다. 뒤늦은 나이에 돈이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해서 뭐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해도 무언가에 매진하고 열중하고 싶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해서 평생직업으로 살았지만 난 쭉 책을 좋아했다. 책을 손에 놓은 적이 없었고 글쓰기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블로그를 시작했고 블로그에 글을 쓸 때면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로 숨 쉬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배우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 등록했다. 동네 엄마들에게 말해봤자 인정의 눈길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혼자 조용히 공부했다.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많은 온라인 강의와 시험으로 인해서 엄마들의 모임에서도 자연스레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2년의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시험기간엔 많은 교재들을 공부하느라 머리가 훌러덩 빠지기도 했고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입학은 쉬워도 졸업은 어렵다는 말대로 사이버대학의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난 2년 후 성적장학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처음 느꼈던 성취감이었다. 뭔가를 해냈다는 자부심과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를 감쌌다. 내 졸업소식에 친한 동생 H가 축하를 해주었고 주변엄마들도 곧 알게 되었다. 순수한 축하를 해줄 수 없다면 침묵을 택하면 될 텐데 불나방은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주변엄마들에게 여전히 내 뒷담화를 했고 은근히 비꼬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언니, 사이버대 공부하셨다매요? 애들한테 신경 쓰기도 바쁜데 무슨 온라인강의를 2년이나 들으셨대요. 뭐 졸업하시고 대학원이라도 가시게요?”
“더 공부하고 싶으면 대학원도 고려해 봐야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단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보는 게 낫잖아. 난 지금 무척 만족스러운데?”
“뭐 언니가 좋으면 된 거긴 한데 대학원은 사이버대처럼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데는 아니잖아요 후훗. 저라면 그럴 시간과 돈으로 애들 학원 한 개라도 더 보낼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졸업하신 건 축하드려요. 성적 장학생이라니 풋. 거기도 그런 게 다 있네요.”
“그러게. 있을 건 다 있더라. 근데 너 집에 혹시 설탕 없니? 설탕 있으면 네 몸에 탈탈 뿌려봐. 하도 베베 꼬여서 곧바로 꽈배기빵으로 변신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뭐라고요?”
“설탕 다 뿌리면 연락해. 내가 한입 크게 베어 물러가줄 테니까.”
불나방의 심리는 알 것 같았다.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대단히 큰 사람이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학벌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혔고 본인이 아닌 남편의 학벌이나 아이의 학업성적을 자랑하곤 했다.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아이에게서 보상받고 싶어 했다. 자신이 해보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아이에게 시키며 대리만족을 느꼈고 학업이나 학원에 관한 정보들을 뿌리며 엄마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싶어 했다. 아이학업에 관한 정보들은 엄마들에겐 흘려들을 수 없는 주제이기에 대부분의 엄마들은 불나방의 정보력에 많이들 기댔지만 난 그런 얘기들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아이공부가 아닌 그냥 아이 자체에 관심을 두고 싶지 어떤 한 가지에 꽂혀서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에 내 것을 찾고 싶었다.
아이 역시 떠먹여 주는 교육이 아닌 스스로 자기 것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불나방은 자신과 다른 길을 가려는 나를 언제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놀이학교에는 불나방과 같은 생각을 하는 엄마들이 은근히 많았다. 따로 할 일을 찾고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하고 공부를 하는 나를 아니꼽게 생각했고 남다른 행동을 한다며 은근히 엄마들 무리에서 따를 시켰다. 불나방은 그 무리에서 장이였고 나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시키고 싶지 않은 교육에 열을 올리며 왁자지껄 어울려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친한 동생 H도 아이교육엔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방식도 이해를 해주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내 아이를 최선을 다해 키우면 되는 것이라 생각해 주었다. 누가 옳지도 그렇다고 누가 그르지도 않다며 중립을 유지해 주었고 나와 불나방의 신경전이 멈추길 바랐다. 얼마 후 H와 커피 한잔을 하기로 한날 그 자리엔 불나방도 함께 나와 있었다. H는 불나방과 내가 대화를 통해 묵은 감정을 해소하길 바랐으나 그녀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우리의 만남은 이날로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언니, 대학원도 준비 중이 시라매요? 언니는 체력도 좋으셔~ 그나저나 포뇽이 영어공부는 제대로 챙기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 나발이한테 들어보니까 영어발표 시간에 포뇽이가 제대로 발표도 못했다던데요? 포뇽이부터 챙기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난 불나방이 매번 포뇽이까지 들먹이며 비꼬는 말투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좋다 우리 한번 끝까지 해보자. 내가 어릴 때부터 말싸움하나는 끝내줬던 여자야. 덤벼 이 불나방아.
“난 포뇽이한텐 영어교육보단 한글교육이 먼저라고 생각해. 포뇽이는 책도 많이 읽고 독후활동도 열심히 하고 받아쓰기도 매번 만점을 받아와. 영어교육도 중요하지. 그런데 그건 아이들마다 시기가 다르다고 생각해. 포뇽이한테 필요할 때 그때 아이랑 얘기해서 시켜도 늦지 않아. 나발이한테 영어가 중요하다고 포뇽이한테까지 중요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포뇽이 학업에는 더 이상 관심 같지 않아 줬으면 해.”
웬만하면 참고 넘어갔고 웬만하면 농담 식으로 받아쳐줬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라도 포뇽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니 언니, 제 얘기는 포뇽이 걱정해서 드리는 말이잖아요.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니에요? 그리고 포뇽이 독후활동 잘한다는 얘기 저희 나발이 비교하는 거죠? 저희 나발이 받아쓰기 잘 못한다고 그거 돌려 말한 거 맞죠?”
아니라고!!! 이 꽈배기 같은 것아. 어디서 꽈배기 천 개를 먹고 왔나 왜 이리 베베 꼬인 거야?
“내가 하는 말에 나발이 얘기는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았어.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으면 해.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면 어떤 말을 해도 싸우자는 것 밖에 안 돼. 아이 교육얘기는 각자의 역할이니 더 이상 꺼내지 말자. 각자 하고 싶은데로 하면 되는 거야.”
“제가 전부터 느꼈던 건데 언니는 꼭 청담동 엄마 같은 거 아세요? 고고하고 우아한 척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척하다가 나중에 과목별로 개인과외 다 붙여서 제 뒤통수 치려고 그러는 거죠? 언니는 '청담동 엄마'고 저는 뭐 '대치동 엄마'라는 거예요?”
이 여자가 청담동 엄마는 뭐고 대치동 엄마는 뭐길래 저러는 거야.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H를 쳐다봤고 불나방은 씩씩 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뭐 언니처럼 우아한척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줄 아세요? 언니는 믿는 거라도 있나 본데 저는 갖고 있는 예산대비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두발 벗고 뛰는 거거든요? 누군 대치동엄마처럼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아세요?”
“지금 나는 우아하게 돈놀이하면서 공부시키는 청담동 엄마라는 거고 불나방 너는 헌신을 다해 몸으로 뛰어다니며 교육시키는 대치동 엄마라는 그 얘기야?? 나원참. 살다가 이런 얘기는 또 처음 듣네. 진짜 청담동이랑 대치동에 사는 엄마가 들으면 콧방귀를 뀌다 코가 없어질 얘기 한다고 비웃겠다. 우린 그냥 둘 다 경기도 외곽엄마라고! 그리고 내가 믿는 게 뭐가 있다고 과목별로 개인과외를 시킨다는 거야? 각자 알아서 애들 잘 키우면 되는 거야.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H는 중재에 나섰지만 우리 둘의 감정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져버렸고 불나방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언니가 어떤 개똥철학을 갖고 포뇽이를 교육시킬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20년 후에 저희 나발이랑 포뇽이 꼭 만나게 해주고 싶네요! 과연 둘이 어떤 성과를 이뤘는지 저희 꼭 만나서 확인해 봐요! 20년 후에 저희 나발이는 아마 포뇽이는 쳐다도 볼 수 없는 대학에 들어갔을 꺼라고요!”
이.. 이런 또라이를 봤나. 20년 후에 넘볼 수 없는 대학만 들어가면 그게 성공한 인생이냐?
“그래! 그러자! 우리 그때까지 죽어라 연락하면서 지내보자고!! 잊지 마!! 20년 후야!!!”
우린 이날 무슨 잊지 못할 연인과의 약속도 아니고 20년 후 장성한 딸들을 데리고 누가 잘 키웠는지 평가하는 만남을 갖기로 철석같이 약속했다. 더 시간을 갖고 싸웠다면 그 여자와 난 아마도 새끼손가락을 깨물어서 혈서까지 썼을지도 모른다. 씩씩거리는 우리 둘을 H는 간신히 떼어놓았고 서로를 노려보며 이날의 만남을 끝으로 우린 영원히 결별을 하게 되었다.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매번 서로를 싫어하면서 겉으로만 웃고 지내는 관계도 불편했고 차라리 깨끗하게 맞짱 뜨고 끝내는 게 후련했다. 이날의 싸움으로 불나방과 친했던 엄마들 역시 나를 떠나갔지만 어차피 나와는 맞지 않았고 결국엔 떠나갈 인연이었다. 한치의 아쉬움도 없었다. 나는 더는 불나방의 콤플렉스에 나까지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불나방은 얼마 후 진짜 대치동으로 이사를 갔다. 이왕 갈 거면 우아한 교육을 시킨다는 청담동으로 가지 그녀는 아무래도 대치동엄마가 되는 게 꿈이었나 보다. 전해 듣기론 아이 영어 교육을 위해 필리핀으로 이주도 생각 중이라 했다. 그녀의 교육이 잘못됐다고 할 순 없다. 불나방이든 어디에 사는 엄마든 자기의 아이를 위해선 모두들 최선을 다해서 고민하고 결정한다. 그런데 난 불나방의 교육이 아이가 아닌 자신을 위한 교육처럼 느껴졌다. 나의 정체성을 아이를 통해, 특히 아이의 학업을 통해 찾으려 한다면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기대고 쉴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끊임없이 다그치고 가르치는 교육자의 자리로만 존재하게 된다.
아이는 커가면서 집 밖에서 수많은 교육자를 만나게 된다. 집 안에서까지 교육자의 자세로 관찰하는 엄마가 지키고 있다면 아이가 숨 쉴 곳이 없다. 나는 아이에게 단 한 가지만을 바라고 싶다. 엄마인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엄마를 좋아하는 아이로 큰다면 타인에게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아이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세상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삶이 즐겁고 행복할 수만은 없겠지만 적어도 내 곁에 있는 시간만큼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불나방아, 나발이 잘 키우고 있겠지. 지금은 대치동일까 필리핀일까. 이 언니는 얼마 전 제주로 내려와 제주댁이 되었어. 네가 예상했던 청담동 엄마와는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래도 이 언니 여전히 우아함만은 잃지 않고 있단다. 이건 비밀이었는데 이 언니의 우아함은 돈이 아니라 아이를 믿고 조용히 관찰할 수 있는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었어. 우리 20년 후 약속 기억하고 있지. 난 나발이의 20년 후는 사실 궁금하지 않아. 20년 후라고 해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을 아이에게 그때 어떤 모습을 보고 무얼 판단할 수 있겠니. 내가 궁금한 건 네 모습이야. 언제나 내가 나를 채우려 했던 것처럼 그땐 너도 너 스스로를 가득 채운 모습이길 바래. 건강하고. 굿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