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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방/ 6살 아이에게 60번째 수학문제 풀기란

by pobi미경


아이를 재우며 오늘도 역시 인별그램을 켰다. 음~ 이 여자 또 놀러 갔구먼. 이 아빠는 맨날 애를 수영장에서 던져대네. 행복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이런 사진은 어떻게 매번 찍는 거야. 음~ 이 여자는 또 언박싱을 했네. 아니 이 주황색 에르상자는 도대체 몇 개째야. 매번 언박싱하는 사진 찍는 건 귀찮지도 않나. 그나저니 이 에르가방은 진짜야? 하긴 뭐 만져본 적도 없으니 진짠지 아닌지 내가 본다고 아는 것도 아니고. 음~ 이 불나방은 또 뭐야. 얼레리?


‘우리 나발이 벌써 60번째 문제 푸는 중! 기특한 우리 딸 파이팅!’

#6살아이공부#60번째수학문제#공부가제일쉬워요#우리딸최고


불나방의 인별그램에는 나발이의 뒤통수와 함께 문제집을 푸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문제집이야 풀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시간은 밤 12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이 시간에 60개의 문제를 풀고 있다는 게 난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학구열이 정상인 것인가. 진짜? 에이- 이러지 마요. 사실일 리가 없어용.


엄마들마다의 학업방식이나 교육관은 무척 다르기에 뭐가 맞고 틀리다고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아직 한글도 잘 못쓰는 6살 아이에게 밤 12시까지 60개의 수학문제를 풀게 하는 건, 그리고 그걸 좋다고 자랑하는 사진까지 올려놓는 건 난 내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그려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는걸 이 포비언니 또 댓글을 남긴다.


‘불나방아, 지금 시간이 몇 시니. 나발이 그만 괴롭히고 61번째 문제부터는 네가 풀고 나발이는 그만 재우는 게 어때.’


불같은 불나방은 댓글단지 1초 만에 답글을 달았다. 인별그램을 뚫어지게 보고 있나 보다.


‘어머 언니, 제가 나발이를 괴롭히다니요! 나발이는 스스로 좋아서 하는 거거든요! 언니가 이런 경험이 없으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나발이는 포뇽이랑 달라서 성취욕이 많다고요!’

‘그러게. 그런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 것 같긴 하네. 앞으로도 잘 모르고 살고 싶네. 굿잠!’

이럴 땐 치고 빠지는 게 최고다.


난 나발이가 안쓰러웠다. 6살 아이에게 가르칠 건 무수히 많다. 하얀 종이에 쓰인 숫자풀이 말고도 세상에 대해서 듣고 보고 들어야 할 일들이 차고 넘친다.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란 평생 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숙제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그 일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체력과 마음부터 키워주고 싶다. 빨리 한다고 잘하는 건 아니다. 빨리 시작했을 뿐 그 과정과 결과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무작정 남이 한다고 똑같은 레이스에 아이를 세우기보다는 어떤 레이스에 서야 잘 꾸준히 달려 나갈 수 있을지 아이의 적성부터 알고 그에 맞는 레이스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싶다. 그리고 엄마인 나는 아이를 끌고 가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세상이라는 차갑고 빠른 레이스에서 뛰던 아이가 잠시 쉬고 싶을 때 충분한 휴식과 안정, 사랑을 줄 수 있는 집 같은 우직한 존재가 되고 싶다.


다음날 하원시간에 불나방 모녀를 마주쳤다. 아이들은 체육시간에 땀을 흘렸는지 머리가 대부분 젖은 채 나왔고 불나방도 나발이의 묶였던 머리를 풀러 말려주던 참이었다. 그런데 저게 뭐지? 나발이 머리사이에 보이는 하얀점? 하얀 구멍? 뭐가 묻은 건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풀려있는 나발이 머리사이로 500원 동전크기의 하얀 땜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나방아! 나발이 머리에 땜빵이 보여! 이거 알고 있었어?”

“어머 언니, 뭐 그런 걸 보고 그래요? 그거 나발이 피부가 약해서 환절기 때 종종 생기는 거예요. 별거 아니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피부가 약하다고 땜빵이 생겨?? 병원 가봤어?”

“가봤어요. 뭐 스트레스다 뭐다 어쩌고 하던데 기분 나빠서 그냥 약 처방받고 나왔어요. 6살짜리가 스트레스가 뭐가 있다고 그게 원인이라는지 참나”

“아니야 나방아. 애들 학업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이렇게 탈모가 생긴다고 나도 들었었어. 아는 동생도 딸이 머리에 갑자기 탈모가 생겨서 다니던 학원 줄이고 쉬게 해 주던데 나발이도 학원도 좀 줄이고 숙제도 너무 시키지 말지 그래. 어제도 밤 12시까지 수학문제집 풀었다며”

“아니, 이깟 머리 좀 빠진다고 학원을 왜 줄여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 나발이는 스스로 원해서 문제 푸는 거라니까요. 그치 나발아? 엄마말 맞지?”


나발이는 멀뚱히 엄마와 나를 쳐다만 볼뿐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했다. 나발이의 얘기를 들어줄 생각도 하지 않는 불나방이 답답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발이의 마음이 느껴져서 같은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미안함이 느껴졌다. 내가 더 해줄 말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불나방이 정해놓은 길에 나발이는 맞춰야 했고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하든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 중이었다.


돌아서서 나오는데 갑자기 옆에서 가만히 듣고 보고 있던 포뇽이가 내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러더니 돌아서선 불나방 모녀에게 갑자리 소리쳤다.


“불나방 이모!!!”

“으응??”

“이모!!!!”

“왜.. 왜 불러??”

“이모!!! 세상의 전부는!! 공부가!! 아니예요오오오오!!!”

헐.

내 딸 누가 키웠는지 기특하고 부끄럽고 용감하기까지 하네. 주변에 있던 엄마들이 우리를 보고 키득거렸고 불나방은 대답할 말을 잃고 얼굴이 벌게졌다. 난 벌어져있는 불나방의 입이 다물어지기 전에 포뇽을 손을 이끌고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닫힘 버튼을 오백번 눌러댔다.


“포뇽아, 왜 갑자기 나방이모한테 그런 말을 했어?”

“나발이한테 저번에 물어봤었거든~ 학원 다니는 거 좋으냐고~”

“그랬더니 뭐래?”

“학원 안 가면 엄마가 화내서 안 가면 안 된다고. 그리고 좋은 게 뭐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포뇽인 기분이 어땠는데?”

“나발이가 불쌍했어. 좋은 게 뭔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내가 나방이모한테 꼭 저말 해주고 싶었어~”


잘했어 잘했어 우리딸. 내가 딴 건 몰라도 딸하나는 기가 막히게 용감하게 키웠네. 엄마가 외치고 싶은 말 우리 포뇽이가 우렁차게도 외쳐줬네.

포뇽이의 간결하고도 정확한 외침은 내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줬다. 포뇽이는 자신이 불나방의 가슴에 대바늘을 찌른 지도 모르고 해맑았다. 아이의 순수함이 고마웠다. 포뇽아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렇게 큰소리로 외쳐주련. 남의 일이라고 돌아서기만 했던 이 엄마 오늘은 너한테 큰 배움 얻었다. 세상에 전부는 공부가 아니지! 몸 튼튼 마음 튼튼 목소리 튼튼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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