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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옆 단지에서의 원나잇(최종)

by 딴짓

아랫글에서 이어집니다.

아파트: 옆 단지에서의 원나잇



기분 좋은 흥분감과 가벼운 발걸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아아~파트 아파트. 로제의 노래가 절로 나왔다. 체크인은 오후 네 시부터. 벌써 다섯 시가 지났고, 나는 마치 기다리는 애인이라도 있는 것처럼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까운 자유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저녁 준비 클리어. 남편에게 톡 클리어. 금요일 밤이라 남편도 일찍 올 테니, 굿굿.



에어비앤비로 잡아둔 옆 단지 숙소는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 나는 맞은편 단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세상에. 이제야 알다니.

겨우 일박인데 노트북에 책은 세 권이나 들고 나왔다. 밤새 책이나 실컷 봐야겠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메시지 창을 흘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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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G*마트에서 사전 예약해 둔 올리브유와 전복의 수령 일이었다. 올리브유는 당장 필요한데. 250mL에 엑스트라 버진이 병당 팔천 원이라는 파격가로, 네 개나 예약해 두었었다. 어쩌지. 어차피 숙소 가는 길이라 픽업하면 되긴 하는데, 그걸 주렁주렁 매달고 숙소로? 그건 아니지. 집 나온 사람의 자세를 챙기라며 스스로를 꾸짖었다. 어차피 돈을 지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화해서 취소하면 될 터였다.



올리브유 네 병과 전복 1kg을 들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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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실에 앉아 있는 초로의 경비원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연스러웠어. 숙소 호스트가 알려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는데, 남의 아파트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낯설고 묘한 기분이란. 허락 없이 누군가의 집에 몰래 들어온 것 같은, 도둑이 된 기분. 나는 거실에 들어섰지만, 그다음에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방을 쓰면 되는지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 방이나 문을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거실 한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스르르 그 자리에 앉았다.



우리 옆 단지지만, 구조가 살짝 달랐다. 다행이었다. 우리 집과 똑같았다면 조금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거실을 훔쳐보았다. 호스트가 주거하면서 동시에 숙박업을 운영하는 공간이라 그런지 정말 짐이 없었다. 언뜻 본 주방과 욕실에도 나와 있는 물건이 없었다. TV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크고 작은 각종 식물이 한가득했다.



현관에서 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호스트가 함께 사는 공간이라는 걸 까먹고는 들어오면서 이중 잠금장치까지 닫아버린 것이다. 나는 맨발로 뛰어나갔다.


“어머, 죄송해요! 호스트께서 같이 사신다는 걸 깜빡하고는 무서운 마음에 문을 잠가버렸어요.”

“아이고, 그랬군요. 괜찮아요.”

요 앞 스포츠센터에서 수영하고 왔다는 그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알죠 그 스포츠센터.

외아들이 다 커서 나간 후 혼자 있다는 그녀였다.


그제야 현관 옆 방을 쓰면 된다는 메시지가 와 있는 걸 알았다.




“밀린 일이 많은데 집에서는 집중이 안 돼서요. 일 끝내려고 노트북 들고 나왔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해명을 해댔을까? 촌스럽게시리.

그녀가 침대에 깔린 온수매트를 쓰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다시 내 방에 왔을 때, 하필 침대 중간에 떡 하니 놓인 책 제목은 ≪가출예찬≫이었다. 나는 황급히 책을 치웠다. 오해예요. 오해라고요.



싱글 침대와 작은 책상, 그리고 작은 옷장이 전부인 공간. 좁아서 답답하다는 생각은 곧 익숙함으로 바뀌고, 눈에 거슬리는 게 아무것도 없는 단출한 공간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주머니도 방으로 들어갔는지 거실도 조용했다. 24시간 홈쇼핑 방송이 돌아가듯 거실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 텔레비전의 부재가 이토록 힐링이 될 줄이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나를 찾는 소리, 그 소리들. 졸음이 쏟아졌다. 온수매트의 온도를 올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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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 일어났다. 네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초저녁부터 자다니, 평소에 한 번도 없는 일이었는데. 그러다가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쉬러 온 거잖아, 여기. 해야 할 일 없어. 하나도.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밥을 차려 먹고 아이들과 TV를 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자기도 가서 쉬어도 되는지를 은근슬쩍 물어왔다. 여성 전용이거든!



왜 읽기도 전에 ‘중년’의 가출이라고 넘겨짚었을까? 일본인 저자가 쓴 <가출예찬>은 열여덟 살이 넘으면 누구든지 부모 집에서 가출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골 때리네. 큰아들에게는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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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쉬고 있다. 모든 것이 편했다. 다만…

- 진짜 자고 가도 괜찮을까? 가뜩이나 OO이 밤늦게 다니는데 괜히 내가 영향 줄까 마음에 걸려.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맘먹고 나왔는데. (가까운데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뭐.)

숙박비를 지불했는데. (4만 원이니 괜찮아.)

내일까지 쉴 수 있는데. (이 정도도 나름 만족스러워.)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새벽 한 시. 종량제 봉투 안의 올리브유 병이 달그락거렸다.




“어, 엄마?”

우리 집 1층에서 나오는 큰아들과 마주쳤다. 아들은 엄마가 이 시간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굴 만나고 왔는지, 술을 마신 건지 추궁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 쐬고 왔다고만 했다. 결코 발설하지 않으리라. 본인은 그 시간에 잠깐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고 하면서 녀석은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지를 확인했다.



알뜰하게 쓴 7시간이었다. 비록 완벽한 일박은 아니었지만, 꿀잠을 자고 온 것만으로도 좋았다. 나는 평소에 불면증이 있다. 그러니까 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잘 수 있었다. 아들이 새벽에 나가든 들어오든, 에라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혹시 체질인가?

나는 근처 흑염소 탕집을 검색해 두었다. 다음번에는 거기에서 아침밥까지 먹고 와야겠다.



집 근처 아지트, 혹은 방공호. 아들, 가족, 내 집을 피해 갈 수 있는 곳. 답사는 끝났고, 다음 방문을 기대한다. 기대한다는 말이 맞는 건가. 안될 건 또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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