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의 보물섬 영도]
방구석에서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편하게 앉을자리, tv와 리모컨. 그 외에 더 필요한 것은 목을 축일 음료 한잔.
이보다 완벽한 여행준비가 없다.
어제는 쿠바를 다녀왔으니 오늘은 국내여행이 좋겠어.
수많은 여행자들을 제치고 선택된 여행자는 [기억수집가].
기억을 수집하는 사람이 바라본 영도.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진행된 부산의 보물 영도에 관한 전시 관람내용이 주를 이룬다.
섬이지만 육지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도 활발히 쓰이고 있는 영도다리 때문일까.
영상으로 보는 여행에 그치지 않고 직접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향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남포동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르는 내가 참 좋아하는 장소다. 상설전시와 특별전시가 있고, 금괴에 담긴 예쁜 빵을 파는 공간. 부산여행을 추억할 기념품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 부산에 사는 사람이지만 관광객의 눈으로, 때론 과거를 탐미하고 싶을 때면 여지없이 들르는 사랑방이다.
부산의 보물이라는 영도. 금은보화와 같은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뜻일까.
영도는 예부터 절영도라 불리던 섬이다. 그림자를 끊을 정도로 빠른 말을 기르던 곳.
언젠가 남포동에서부터 해양대까지 갈맷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깡깡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던 바다마을을 지나 모든 곳이 자유롭게 보이는 흰여울마을까지 걷다 보면 눈은 호강하지만 다리와 발이 매우 피곤하다.
지침을 덜어낼 정도의 큰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로 절영교였다. 영도의 이름이 이곳에서 왔구나. 얼마나 빠른 말이길래 그림자를 끊어낼 정도였을까. 혹은 화려한 언어구사, 뛰어난 필력으로 '절영(絶影)'이라는 단어를 기억의 흔적으로 남기게 되었을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찾은 전시의 첫 시작부터 마음에 꼭 든다.
이제부터 보물 찾기가 시작되는 거니까.
영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색으로 말의 탈출을 방지하고 외부로부터의 질병유입을 막아 우수한 혈통을 보존하는데 최적의 환경이었다. 후백제의 견훤이 절영도의 우수한 말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화친의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과 1663년 허목이 편찬한 목장에 관한 지도인 목장지도에 기재된 절영도 목장에 대한 기록으로 우리는 절영도가 최고급 말의 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절영도의 첨사로 오래도록 부임한 임익준 첨사가 베푼 성정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임익준 영세불망비와 청덕선정비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고마운 마음을 고이 간직하고 후세에 알리려던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절영도 첨사였던 임익준은 이름 없는 영도의 산에 '신선의 산'이라는 뜻의 '봉래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에는 커다란 힘이 있다. 그 영험함이 지금 영도 봉래산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확신의 힘을 주고 있다.
신선의 산, 올해 첫 등산지는 봉래산으로 확정이다. 그림자를 끊어낼 정도의 속도는 아닐지라도, 오롯이 나를 위한 걸음을 걸으며 한 해의 안녕과 무사평안을 기대해야지.
영도의 중심에 자리 잡은 봉래산의 산신은 '영도할매'로 알려져 있다.
뭍으로 나가면 3년 안에 망해 다시 영도로 돌아오게 한다는 짓궂은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도할매의 눈을 피해 밤에 조용히 이사를 하며 절대 뒤돌아 보면 안 된다는 금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영도에서 빼놓을 수없는 명소. 그곳이 바로 태종대다.
왕이 활을 쏘던 자리, 통치자의 시선이 바다로 향해 있던 곳이다.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해 개인을 넘어서 사회를,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염원을 실어 보내던 장소가 바로 태종대였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기대를 기꺼이 감내하는 태종대와 영도할매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와닿는다.
영도를 보다 가깝게 느껴지게 만드는 존재, 영도다리. 예전에는 부산대교라 불렀던 상징성이 있는 다리다.
1934년 당시에는 국내 유일의 도개교였고,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영도대교가 도개 되는 영상을 보면서 발전하는 한국의 산업을 눈으로 확인하며 과거를 잊지 않는 이곳만의 문화를 체감할 수 있다.
영도와 동래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전차였다. 하지만 산업발전으로 교통의 중심이 자동차로 변화하면서 1968년 5월 20일로 전차가 멈추게 되었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전차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 뿐이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땅이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는 사실이 발끝으로 전해진다.
해방 후의 영도는 피란민들과 이주민들로 가득 찼고, 그중에는 예술인들과 제주 해녀도 있었다.
춘곡 고희동 선생이 그린 [부산 영도 해안]을 보면 1952년도에도 혼잡했던 항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조선시대의 배가 그때까지 존재하고 있었고, 상행위를 위해 배를 타는 사람, 공부를 위해 떠나는 사람, 가족을 만나기 위해 돌아오는 사람 등이 분주히 배를 타고 이동했을 것이다.
영도와 부산내륙을 잇는 대교는 1933년 일제강점기 시절 착공되었다. 항만이 오고 가야 했기에 국내 최초의 도개교로 건설되었고, 어려운 공사였기에 많은 공사 관계자들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죽기 전에 영도다리는 보고 가야지.'가 그 시절 유행어였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만나기 위해 영도다리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이름과 사연을 적은 쪽지를 영도다리 난간에 끼워 놓는다. 지금의 힘듦에 좌절하지 않고 내일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영도다리 밑 점집을 찾았고, 영도다리 건축자재들을 모아놓은 창고에서 급하게 마련된 목조가옥에 80여 채나 되는 점집이 지어지기도 했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을 때 점집을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사람의 모습은 참 한결같다. 나 또한 그렇다. 점집에 가지는 않지만, AI에게 올해 사주풀이와 운세를 물어보았으니 말이다.
부지런히 지금처럼 했던 일을 계속한다면 그 성과가 빛나는 한 해가 될 지어다. 말하는 대로 꼭 이루어져라. 주문을 걸어본다.
시간이 지나도 선명한 것은 각자의 기억이다. 영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지만, 그를 스쳐간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야기로 남아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해양대 생도, 태종대를 찾는 관광객들을 바삐 맞이하는 상인들의 모습. 그리고 또 언제 볼까 싶은 바다를 보기 위해 전망대에 모여있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바다에 대한, 사람을 향한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만난 영도를 그린 지도가 놀라움을 선물한다.
개인의 기억에 맞추어진 영도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누군가의 지도에는 부산대교가 중심이 되고, 3번에 걸친 이사에 꼭 빠지지 않는 오락실, 추상적으로 그려진 영도의 모습들이 재미있다.
내가 기억하는 영도와 아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나 또한 내가 살아온 지역에 대한 지도를 그리고 싶어졌다. 내가 바라본 모습 또한 그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기억이 이야기가 되고, 추억을 거슬러 오르는 나만의 지도를 만들고 싶다.
방구석 여행에서 시작된 영도 이야기는, 직접 영도를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전혀 낯선 곳이었지만, 영도는 가랑비에 젖듯 조심스럽게 나를 물들이고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찾았던 태종대는 쉽게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길치였던 내가 길잡이었던 탓에 함께 갔던 친구들을 고생시켰지만, 그만큼 강한 첫인상이 남아있다.
해양대에 다니던 친구를 찾아 영도를 찾았을 땐, 활기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때 불었던 싱그러운 바람과 바다이야기는 공포와 함께 호기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부산의 보물섬 영도에는 보물 같은 이야기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도의 모습이 나에게도 그려진다. 건강한 말이 뛰놀고,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귀 기울여 듣지만 때론 거칠게 사람들을 대하는 영도할매의 모습. 활짝 열린 다리 아래를 부지런히 지나는 배와 영도다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반가워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 사람들.
각자의 기억이 모여 역사가 완성된다.
역사의 기억. 보물 찾기의 보물을 드디어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