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은 것들: ② '임시'라는 특별함

임시 수도 기념관은 부산에만 있습니다

by 천둥벌거숭숭이

예기치 못한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나를 만든다.

다대포로 향하는 길은 유독 멀었고, 환승하는 순간에 만난 옛 건물에 눈길이 머물렀다.

갑자기 만난 낯선 이정표를 따라 임시 수도 기념관을 만난 순간, 오래도록 보지 못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처음 왔지만, 꼭 와보고 싶었던 곳.

낯선 이의 집을 마음껏 둘러보면서 그 사람의 삶을 그려볼 수 있는 나만의 상상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임시로 정한 길에서 만난 곳. 뜻밖의 세상으로 나를 초대한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관람인원 제한
임시 대통령 관저의 집무실이 휑하다

예전부터 그려왔던 나만의 환상이 있다.

내 집을 갖게 된다면 집에 꼭 계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

한 칸 한 칸 올라갈수록 기대감이 커지고, 계단 위의 공간은 오롯이 개인의 공간으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나만 볼 수 있는 곳.

혹은 애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아직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남의 집 계단은 얼마나 설렘을 주는지 나를 모르는 사람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 만나는 2층의 모습이 마냥 휑하다.

예전에는 가구와 사람들, 서재의 모습이 존재했을 것이다.

관람 인원이 최대 7명으로 제한할 정도로 약한 2층을 오래도록 보기 위해서는 아마도 지금이 최선이리라.

덕분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앉자마자 푹신한 의자와 묵직한 무게감의 책상. 보기만 해도 배부른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이 언제나 자신이 선택되기를 목놓아 기다리고 있었겠지.

응접실에서 짧은 담소로 보내기 싫은 사람들을 집무실에 데려와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의 깊은 속내를 털어내는 것은 소소한 즐거움일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에는 영화 한 편이 제작되고 있었다.

임시 수도 기념관 영상물 상영
쌀 한 가마니 무게는 80kg. 지금의 우리를 받쳐주는 과거의 모습.

허한 공간을 채우는 것은 1023일의 역사를 담은 7분어치의 영상과 고난도 기꺼이 받아들인 삶의 모습이 담긴 7분의 영상이다.

전쟁 발발로 정부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전한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023일간 있었던 이야기.

급격하게 모여든 사람들로 수용소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살기 위해 날림으로 지었던 판잣집과 하꼬방. 안전보다 그저 살기를 희망했던 사람들.

그 속에서 일어난 대화재사건에 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누군가의 무덤과 비석이 다른 이에게는 집터와 기단이 되어주기도 했다.


아픔의 역사가 단 7분의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집에 있던 헌 옷이라도 가지고 나오면 먹을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맨손으로 나와 어떤 일이든 해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이 만든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과거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취한다.

허투루 보내선 안 되는 오늘이 진심으로 느껴진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누군가의 명언이 여실히 느껴지는 순간이다.

임시 수도 기념관 야외 전시와 전시실
임시 수도 기념관 방문기념 스탬프

한국 전쟁에는 한국인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UN군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일이 다반사였다.

야외에 펼쳐진 전시에는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당시 전쟁으로의 피해가 적은 부산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소달구지로 떠나는 사람들.

남행열차와 흥남부두에서 승선을 기다리는 사람들. 익숙한 노래제목들이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은 슬퍼도, 괴로워도 노래를 불렀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일까. 비극을 희극으로 희화하려던 의지일까.

스치듯 지나는 공간에도 역사를 잊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한 발자국, 두 걸음에 진한 무게감이 실린다.


임시 수도 기념관 전시실에는 밀다원, 고무신에 관한 역사전시가 해를 이어져 진행되고 있었고, 운이 좋은 관람객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어, 그저 좋았다.

인증도장 찍는 것을 극히 즐기는 사람이다.

도장에 이름이 쓰여있지는 않았지만, 유추를 해가며 각 자리에 맞게 스탬프 찍는 재미가 있다.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차모양의 피란민증, 국제시장 번영회를 상징하는 장바구니, 예술가들의 모임장소였던 밀다원(다방), 한자만 읽으면 맞출 수 있는 부산시민증.

아마도 나는 인증을 완료한 듯.

지금도 구직중, 판자를 이어 만든 판잣집.
판잣집의 내부 공간

한국 전쟁이 시작되고 3일 후부터 전국적인 부산으로의 피난이 시작되었다.

정부의 제재에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부산으로 집중적으로 모였고, 수용소는 턱없이 부족했다.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은 화재로부터 취약했고, 대화재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포화상태의 인구 밀집도에 배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UN군대에서 나온 쓰레기로 만든 꿀꿀이죽으로 사람들은 연명했다. 담배꽁초와 기타 쓰레기들을 걸러내고 먹는 음식에 목숨을 걸었다.


가진 것은 몸뚱이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밖으로 연신 나와 구직활동을 시작하고, 부둣가에서 어떻게든 일을 구해 한 푼이라도 받아 가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양상.

살기 위해 직업을 구하는 사람들, 살아갈 이유를 만들기 위해 직업을 찾는 사람들.

무엇이 옳은지는 모른다. 다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쌀 한 가마니가 80kg라는 것을 지금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궁핍해도 최선을 다해 살았던 사람들의 집이 불에 타고, 시멘트로 변화하고, 새마을 운동으로 탈피에 가까운 변화를 접하며 지금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채 100년도 안된 시절의 이야기가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구호물품으로 살아가는 피란민들, 부산의 식문화 정착.
1951년도 부산 물가표

전분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북쪽 지역에서 자주 먹던 냉면이 그리워진 사람들이 구호물품에서 해답을 찾았다.

밀가루, 설탕, 분유, 의복 등등에서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일상생활에 녹인다.

그래서 나온 특별식. 부산에서 유명한 밀면이 바로 여기서 탄생한다.

전분이 들어가 쫄깃한 식감의 냉면을 밀가루로 만들면 어떨까.

심심한 육수맛에 새콤 달콤함을 더하고, 잘 끊어지는 밀가루 반죽으로 냉면보다 굵은 면발을 만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우리의 맛이 어느새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힘든 부둣가일을 하면서 먹던 곱창골목과 돼지뼈를 오래도록 우려 만든 국밥 역시, 힘든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 만든 최선의 음식이 지금에는 별미로 평가되고 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방법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몫한다.


벽보로 붙은 물가표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부산일보 1951년 1월 4일 자로 소개된 물품에 김 100매 800원. 요즘 시세로 김 100매는 양과 질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10,000원에서 20,000원 사이로 추정된다.

세수 비누 200원. 슈퍼에서 구매하면 비누 4개에 5천 원 선.

계란 한알 180원. 집 앞 청과점에서 계란 한 판에 8,500원이었으니 한 알에 284원.

필수품의 가격이라 76년 전의 가격과 크게 동떨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판매하는 물품의 단위가 낯설게 느껴질 뿐. 계란 한 알을 산다던지, 세숫비누 하나만 사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짜장면 한 그릇 100원이 지금은 7500원.

필수품보다 기호품, 사치품들의 물가상승이 거대하다.

꼭 필요한 것보다 취향, 혹은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무위의 가치에 사람들의 지갑이 열리고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듯하다.

다 같이 못 살던 시절이 차라리 그리우려나.

반드시 해야만 하던 것들이 넘치던 시절과 하고 싶은 것이 특출 나게 없는 오늘이 참 다르게 느껴진다.

부산으로 피란한 예술가들의 밀다원, 그리고 고무신
고무신은 혁신이자 우리의 문화였다

기뻐도 슬퍼도, 혼자도, 함께일 때도 늘 노래를 부르는 민족.

피란생활에도 예술가들은 각자의 재능을 꽃피웠다.

특별기획전 <다방 전성시대>.

한국전쟁으로 갈 곳 없던 예술가들이 광복동의 다방에 모여 음악감상화 미술작업, 전시 등을 하며 시대의 비애와 위로, 서로를 공감하며 남긴 작품들을 짧게 볼 수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지금도 널리 불리며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2024년도 특별기획전 고무신.

1921년 일제강점기에 한국형 고무신이 등장했고 1923년 부산 좌천동에 일영고무공업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고무신 산업이 시작되었다.

짚신에서 고무신으로의 변화는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내구성과 방수성이 뛰어난 고무신은 국민 신발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고, 대부분의 고무신은 부산에서 생산되었다.

1960년대 주요 수출사업으로 한국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지만 1970년대에 운동화가 대중화되면서 고무신의 선호도가 줄어들어 지금은 그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사진으로만 보던 고무신, 만화에서나 보던 고무신이 나의 신발장에도 자리 잡고 있다.

여름날 신기에 참 좋다. 맨발에 신기 좋고 세척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굳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기호에 의해 구매한 고무신은 5천 원.

없는 추억을 염가에 구매해 나만의 기억으로 만들기는 올해도 계속될 예정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정인성 선생과 과거의 아들 정영모 선생이 카메라로 담아낸 1950-60년대 부산 시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얀색, 검은색. 쉽게 찢어지지 않고 방수성이 뛰어난 고무신은 모두의 발을 지켜내고 있었다.

험준한 산자락에 위치한 집까지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발을 감싸던 고무신은 추억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사진 하나하나에도 기억과 이야기가 주렁주렁 맺혀있다.


오래도록 아껴온 장소답게 [임시 수도 기념관]에는 많은 이야기와 볼거리가 가득하다.

아미동 비석마을을 갈 때도, 깡통시장에서 좋아하는 과자를 고를 때도, 보수동 헌책골목을 거닐 때도 항상 이곳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지 않았을 때는 꽤 멀게만 느껴졌던 이곳에 당도하고 보니 매우 가까웠다.


한국. 전 세계적으로 보면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작은 크기의 나라.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로 4시간, 고속열차를 타면 2시간 30분.

하지만 그 밀도와 가치는 한없이 무한한 나라.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나라 이름이 바뀌고 수도는 더 많이 바뀌었지만, 1023일간 보낸 부산의 임시수도 시절의 이야기가 참 깊게 느껴진다.

필요에 따라 임시로 정해진 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임시가 만들어낸 특별함의 힘이 거대하다.

그래서 오늘의 부산이, 나의 하루를 보내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언제나 찬찬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