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해양 드라마 세트장에서 바라본 진짜 같은 가짜
불현듯 쪼임을 당했다.
여행유투버가 엄마와 함께한 여행기 영상을 올린 후부터.
예기치 못한 사고를 극히 싫어하는 사람은 여행을, 심지어 해외여행은 싫음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홍콩에 가고 싶다는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홍콩에 가면 무얼 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다.
뭐가 좋은지, 왜 가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없지만, 가고 싶은 생각이 들면 가야 한다의 지론.
한번 우기기 시작하면 설득도, 설명도 필요치 않다.
무조건 다 해주지 않아도 된다. 같이 해나가면 된다는 엄마의 말에 한숨부터 나온다.
집 안에서는 나의 보호자, 집을 나선 순간 뒤바뀌는 역할분담.
싫어. 하지만 내가 해외여행을 나가게 된다면 꼭 엄마를 데려갈게.
말로 하는 위로는 쉽사리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급하게 결정된 짧은 여행.
비교적 가깝지만 여행의 느낌이 나는 곳.
예전에는 마산이었지만 지금은 창원으로 바뀐 그곳.
창원 해양 드라마세트장이다.
언젠가 가야지하고 미뤄뒀던 보물상자 안의 장소를 찾아간다.
진짜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유보시키기 위한 차선의 선택.
가짜를 위한 진짜 여행을 시작한다.
운전하면 소요시간 1시간 20분. 생각보다 짧게 느껴지지만 낯선 길은 언제나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한다.
차 안의 내비와 휴대폰 내비를 번갈아 보며 기계조차 맞지 않는 마음과 추천 경로로 인해 어느새 낯선 곳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당황했다는 사실을 발산하지 않는다. 옆에 있는 엄마마저 불편하게 만들 수 없다.
고도로 발전된 사회를 살고 있으므로 곧 내비는 가야 할 길을 재빨리 찾는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애써 무시하며 예정보다 3분 빠른 1시간 17분 만에 목적지에 당도한다.
위트 있는 길안내였지만, 초행자는 무서웠다고.
오전 10시가 넘어 도착한 해양드라마 세트장 주차장이 한산하다. 운전의 피로를 풀어줄 만큼의 넉넉한 주차장이 벌써부터 마음에 든다.
오랜 보수공사를 거쳐 새롭게 단장을 하는 중인 드라마세트장의 안내 팸플릿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필시 주차장 앞에 있는 안내도를 찍어 가시길.
각 건물에 대한 설명이 안내도에만 되어 있으므로 무심코 찍은 사진 한 장에 모든 것을 기대게 된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사람의 쓸모를 다시 한번 느끼는 중이다.
드라마 세트장의 대문역할을 하는 [비밀연구동]이 굳게 잠겨있다. 아직도 비밀리에 무언가를 수행하는 듯하다.
비밀연구동의 가옥 모습 또한 수상하다.
너와집. 나무로 된 지붕과 기둥. 이 모습이 과연 가야의 주거형태였을까.
궁금하면 찾아보는 것이 인지상정.
가야 관련 학술자료와 국가기록원을 야무지게 찾아본다.
궁금증 해결을 위한 자료조사는 어쩌면 나의 광기인지도 모르겠다.
존재한 역사이지만, 자료가 극히 드물다.
남아있는 기록과 사료에 의하면 가야의 주거는 수혈식(움집)과 고상식(고상가옥)이 주류를 이루었다.
왕까지 초가집에 살 정도였으니, 이런 너와집은 가야시대의 주거형태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드라마 세트장인 사실을 잊고 어쩌면 진짜 가야시대의 집을 본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만든 이의 그럴듯한 노력일까, 보는 이의 무지일까.
'가야시대'라는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이미지가 비슷해서일까.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가야의 지형에 맞춘 움집과 병충해로부터 피하기 위해 지은 고상주택은 가야 관련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땅을 파서 지낼 공간을 만들어 지붕을 덮는 식의 수혈식 가옥과 쥐와 뱀으로부터 약곡과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고상주택을 생각하니 정답이 나오는 듯하다. 촬영이 힘드므로 절충안으로 만든 주거의 형태가 너와집 아니었을까.
세트장 초입에 자리한 소원 들어주는 나무. 소원수.
너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으니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겠지?
나의 추측이 맞을까?
소원을 묻는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가끔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아무런 말이 없는 나무지만, 그저 내 말을 들어주어서 참 고맙다.
무엇이 가짜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그 사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바다와 인접한 가야지역은 철광석 생산지였다.
바다 바로 앞에 만들어진 야철장은 불철주야로 일하는 사람과 상인, 그리고 도공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가만히 존재하는 가짜의 존재에 진짜 이야기가 피어난다.
상시 불을 피우는 가마와 그 옆에 철을 주조하는 소리, 깡깡.
연맹국가였던 가야에서 철은 어떤 존재였을까.
지키기 위한 수단? 먹고살기 위한 교역의 물품?
오늘을 살아내기 위한 밥벌이와 내 가족을 지켜내기 위한 무기정도가 아니었을까.
물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필수품이지만, 부족한 자들에게는 사치품이었을 유형의 것.
야철장 앞에 만들어진 입구가 뚫린 나무집은 가마를 위한 땔감을 위한 공간.
모르고 볼 때는 큰 개집.
용도를 특정하는 것은 쓰는 사람의 마음. 가야시대 드라마 세트장을 보러 왔다가 집에 있을 강아지를 생각하는 것은 애견인의 마음인가. 그저 잡생각이 많은 사람의 헛소리인가.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헛소리쯤 아무것도 아닐 테지.
유적지가 아니라 마음 편히 돌아보고, 상상할 수 있어서 더 좋아지는 순간이다.
퓨전 사극에서 보던 동그란 문이 인상적이다.
드라마 김수로에 나왔던 객잔인 가야관이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지만, 객잔의 문은 잠겨있었다.
안내문의 설명에는 촬영소품으로 준비된 일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지만 볼 수는 없었다.
잠겨있는 문은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오늘 못 보면 내일 보면 되니까. 언젠가 다시 와야 하는 이유를 하나씩 적립한다.
가야관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이색적인 건물은 공동우물로 만들어진 '새우정'이다.
잉어왕일까.
공동우물로 만들어졌지만, 제사의식이 행해졌을 것만 같은 외형과 분위기가 있다.
우물은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
긴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던 그 시절을 재현한 모습일까.
바다와 맞닿아 있어도 바닷물은 갈증에 치명적이다.
지하수와 해수. 먹을 수 있는 물과 삶을 살게 하는 물을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해양 드라마 세트장에서 중심에 위치한 곳, 바로 김해관이다.
가락국의 초대국왕인 김수로왕과 그의 부인,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의 소개와 포토존이 입구부터 준비되어 있다.
가야시대를 알리는 사람이 김해관의 시작을 알린다.
가락국이 곧 가야, 금관가야의 시작이었던 김수로의 이야기는 신화처럼 우리에게 전해진다.
6개의 알에서 태어난 사람 중의 하나였고, 가야에 대한 기록은 신라와 교류했던 사료로도 남아있다.
신라의 왕 탈해 이사금과 기술로 겨뤄 왕권다툼을 했고, 그 결과 수로왕이 이겼다는 사실.
키가 9척이었다는 한나라시대의 기록은 지금의 수치로는 약 203cm로 남아있으며, 허왕후는 156세, 김수로왕은 157세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에 와서 백세시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지만, 이 시대에 100살을 넘어 살 정도면 진짜로 신이 내린 사람이었을까. 혹은 그를 추앙하여 누군가가 남긴 기록의 흔적일까.
믿음을 가진 순간, 그것은 진실이 된다.
김해관 내부는 우리가 흔히 사극드라마에서 보았던 소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의 외형을 띤 나무조각품은 저주를 위한 제물일까, 혹은 사람 대신에 희생되었던 의식의 제물일까.
유물은 아니지만 만지면 안 되는 것들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에 젖어든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을 따라 만든 것일까.
실제 팔만대장경 목판은 평화와 안위를 바랐던 사람들의 염원이 한 땀 한 땀 깎아 만들었다면, 지금 여기 있는 목판은 틀에 찍은 복사품.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진짜를 이곳에서는 편하게 가짜로서 볼 수 있다.
물론 만질 수 없는 것은 똑같다.
역사 드라마 한 편이 제작되기까지의 고충이 전해지는 세트장이다.
김해관 바로 앞은 선착장. 초창기 해양 드라마세트장의 안내문에 의하면 배가 3척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은 단 2척만이 물 위를 유영하고 있다.
바다처럼 만들어졌지만, 간만의 차이인지 바다와 이어진 물길은 끊겨있고 인공 호수처럼 보일 뿐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물결은 평화로워 윤슬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코스피 오천의 맛이 이럴까.
코스피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물결처럼 잔잔하기만 한 나의 통장잔고는 언제나 고요할 뿐이다.
김해관의 2층으로 차분히 올라가면 탁자와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가야시대가 아닌 조선시대라 말해도 무방할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드라마 세트장을 보면서 역사를 생각하게 만드는 재밌는 장소다.
김해상 선착장으로 향하는 다리가 있어 수월하게 돌아볼 수 있다. 나무 계단이 삐걱거려 내려가는 것이 조금 겁이 났는데 2층으로 나가는 문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게가 줄지어 서있는 거리. 바로 저잣거리에 입성한다.
야철장이 있으면 대장간이 있어야지.
지금도 농사일할 때 쓰이는 낫과 도끼, 호미와 어디에 쓰이는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인두까지 야무지게 놓여있다.
철제 농기구 옆을 차지한 것은 바로 가야시대로 추정되는 집모양 토기.
고상식 집모양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 박물관에서야 볼 수 있는 것들을 여기서 만나니 또 반갑게 느껴진다.
에밀레종으로 유명한 성덕대왕신종이 여기 왜 있는 거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여기에는 가짜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스러운 무언가라면 다 가져다 놓아도 그럴듯해 보이니까.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아야지. 꼬투리 잡기 시작하면 시작조차 못할 일이다.
연맹국가로 알려진 가야에서 전쟁을 이리 많이 했던 것일까.
전쟁에만 사용되던 투구와 보호장비들이 매대를 차지하고 있다.
다분히 촬영의상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질서 없이 놓여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귀찮음이 느껴지는 훌륭한 의도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옷걸이에 걸려있는 복식들이 인상적이다.
저고리와 치마로 구분되는 비교적 최근 의상들이 아닌, 발해, 고구려, 신라, 백제, 신라, 고려시대까지를 아우르는 의복이 눈에 띈다.
관복과 두루마기, 갑옷과 안에 입는 보호대까지.
의복에서만큼은 고증에 힘썼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손대면 안 되기 때문에 그저 바라봄으로써 생각할 뿐이다.
오늘 이곳에 올 생각은 없었다.
쪼임을 당하기에 최후의 보루를 꺼냈을 뿐.
낯선 길 위를 달리는 두려움과 처음 만나는 장소에서 만나는 나를 알아가는 설렘.
곁에 있는 이를 위해 하루를 다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 뿐이다.
진짜 여행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찾은 가짜의 장소.
나에게 여행이란 불현듯 떠나는 것. 준비는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기대는 만족보다 실망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렇기에 기대 없이 찾은 해양 드라마 세트장이 엄마에게는 낯선 설렘과 즐거움이 있었다.
물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서 조잘조잘 설명해 준 덕분에 이해하기 쉬웠다는 소소한 보상이 나에게는 하루에 대한 수고비와도 같다.
언젠가 사라질 존재여도 그 자체로 빛나게 살면 된다.
실재 존재했던 가야를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 허구의 드라마일지라도 과거를 기억하게 만드는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가짜에게 배우는 진짜 이야기.
오늘 엄마와 보낸 나의 하루는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