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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Aug 06. 2024

안경다리가 부러졌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

안경테가 부러졌다.

갑자기.

찌는 듯한 더위에 흐르는 땀을 주체 못 하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끝자락.

더위를 한 김 식히고 자기 전에 샤워를 한 후,

흐린 안경알을 닦아내던 중 벌어진 사건이다.

엥?

안경 닦다가 안경다리가 부러졌다.

저녁도 안 먹었는데, 내가 힘이 이렇게 세었던가?

플라스틱이 더위에 녹은 것인가?

아니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름의 액땜을 넘기는 것 아닌가.

재난지원금으로 산 거액의 안경이 허무한 순간에 무쓸모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닥칠 나쁜 일들을 이렇게 막은 거라고 생각한다.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내일 아침 눈 뜨면 바로 안경을 맞추러 가야겠다.


안경인에게 안경이 부서진다는 것은 눈에 공격받는 것과 같다.

흐릿하게 보이는 세상이 그렇게 싫지는 않지만 불편하다.

일단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 된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 버스정류장에 서있지만, 오는 버스의 번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요즘엔 도착 전에 버스정류장에서 안내방송이 나와서 수월한 편이다.

안경 하나 부러졌는데 세상이 달라 보인다.

조금의 불편함이 세상을 보는 눈을 더 트이게 하고 있었다.

안경인들의 성지 안경점

안경점에는 정말 많은 안경이 있다.

입구에 있는 아동용 안경이 귀여웠다.

아기들은 언제부터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아기들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모빌을 설치해서 안구운동을 하게 하고, 햇볕에 눈 상할까 봐 아기들이 타는 유모차에 햇볕가리개를 설치한다.

아기들의 시력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다.

보다 다른 아이들보다 부딪힘이 많다면, 바로 앞에 있는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안과로 데려가겠지.

말 못 하는 아이를 데리고 안과에 가면 정밀 검사 후에 시력이 확인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작은 아이의 안경이 나온 것이 아닐까.

자그마한 안경을 보고도 생각에 생각이 피어난다.

그러나 지금은 내 안경이 먼저다.

재난지원금으로 좋은 안경테와 더 좋은 안경알로 맞춘 안경이었지만, 처음은 소중하고 그다음은 익숙해진다.

몇 번 밟기도 하고, 길 가다가 떨어뜨리기도 했다.

모자 쓰다가 떨어뜨리고, 안경을 들고 있다가 부주의하게 손을 놓치기도 했다.

그래도 잘 견뎌줬다.

2년, 잘 버텼다.

그리고 나는 오늘 새로운 안경을 사기 위해 여러 후보군들을 지켜본다.

뚜렷한 취향이 있다.

코걸이가 따로 없는 색이 짙은 안경.

안경 3개를 써보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직원분께서 놀랐다.

빨리 안경을 고르시네요.

고심해서 결정하지만, 늘 첫 번째 고른 것이 기준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금방 안경테를 고르니 이제 안경알을 선택할 순서가 되었다.

uv차단, 압축렌즈에 더해서 블루라이트차단.

요즘 폰과 노트북 화면을 자주 보니까 안경알에 돈을 더 쓰기로 했다.

신제품이 나왔다길래 어떤 성능인지 얘기해 주셨지만, 전문가가 아니니 이해는 잘하지 못했지만 당당히 해달라고 했다.

이전에 쓰던 안경과 도수는 같지만, 더 선명하게 보여서 어지러울 수 있으니, 한 달 이내에 오면 이전에 쓰던 렌즈로 무료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주 친절한 곳이다. 흡족했다.

30분 기다리라고 했지만, 10분 만에 완성되었다.

역시 빨리빨리의 민족이다.

어젯밤 잃은 눈을 오늘 오전에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안경점 안에 있는 휴식공간이 좋다.

오랜만에 재스민차 한 잔 했다.

다 지나간 일이다.

안경이 부러지면 새로 맞추면 되는 것이다.

다만 통장 잔고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꼭 나에게 필요한 소비다.

그렇게 새로 맞춘 안경은 나를 새롭게 한다.

고심하고 고른 안경이지만, 아무도 내가 안경이 바뀐 걸 모른다.

이렇게 인간의 취향이 한결같은 것이다.

바뀐 것은 나만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도 즐겁다.

나만 아는 비밀.

나만 아는 즐거움이다.


안경 없이 살아도 되지만, 안경 없이는 불편한 삶이다.

오늘 산 안경은 오늘 소중하다.

금방 또 익숙해지겠지만, 당분간은 애지중지 대해야지.

안경점에서 받은 일회용 안경 닦기로도 닦아보고, 자기 전에는 꼭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야지.

익숙하지만 소중한 것.

안경다리가 부러진 덕분에 어제보다 더 맑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인생은 그런 순간들의 모음집인 것이다.

그렇게 다가오는 입추를 가볍게 맞이하고 더위를 이겨내는 것이다.

오늘도 더위를 이겨낸 당신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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