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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Aug 14. 2024

무더위에 태종대를 걷는다는 것은

부산 바다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단연 태종대.

광복절을 앞두면 항상 가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태종대이다.

태종대는 나에게 아련한 추억이 서리어 있는 곳이다.

때는 바야흐로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친구들과 수능 치기 전 기차여행을 가보자.

가야 할 대학을 골라야 하는데 태종대는 어디냐고 묻는 친구의 이야기가 즐거워,

급하게 선정된 태종대.

심지어 성격유형검사 MBTI가 INFP인 내가 계획을 짠 무지성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여행은 계획이 없어도 즐겁다는 철학을 가진 내가 역시 대충 짠 엉성한 계획으로 인해 버스를 잘 못 타, 태종대와는 반대방향의 영도 종점에 하차하여 1시간 이상을 땡볕에서 걷다가, 친구들에게 욕이란 욕을 다 먹고 배가 불렀던 여름이었다.

결국 태종대 앞에 당도했지만, 이미 지친 친구들은 태종대를 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집에 가자고 해서 미련 없이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던 아련한 기억.

지금도 친구들과 태종대 얘기만 하면 힘들었던 이야기, 구두 신고 왔다가 호되게 당한 친구, 지친 몸을 이끌고 부산역에서 맛있게 먹었던 지금은 단종된 롯데리아 오징어버거.

태종대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로 금방 추억에 잠기는 나에게는 참 낭만적인 장소다.

희한하게도 태종대 입구까지는 자주 갔는데 태종대 안으로 간 적은 드물다.

태종대는 늘 나에게 멀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쉽지 않다.

큰 맘먹고 떠나는 부산여행.

그 이름도 거룩하도다 태종대.


태종대를 가기 위해서는 버스 환승을 두 번 해야 한다.

일단 엄마가 본다고 빌렸지만, 읽다가 흥미를 잃은 책을 도서관에 반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옆사람에게 책을 소개하는 것은 좋지만, 그 후처리는 조금 귀찮다.

그래도 책을 좋아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말없이 대신 책 반납을 한다.

요즘은 버스만 타면 시간이 잘 간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움직이는 냉장고인 버스 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밤에 부족한 잠을 시원한 버스 안에서 채우는 중이다.

그리고 도착한 센텀시티.

내가 타야 할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웬걸.

58분을 기다려야 한다.

부산 1006번 시내버스는 배차간격이 34분이다.

이상하다.

전산 시스템에 이상이 있을 수 있으니 여유롭게 30분의 시간을 나에게 주기로 했다.

바로 서점 가서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이 무언지, 또 어떤 책들이 나왔는지 구경하는 것이다.

멀쩡한 어른 되긴 글렀군. 참말이다.

짱구를 좋아하는 덕후가 충분히 좋아할 만한 그림체와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짱구 만화의 에피소드를 주제로 작가가 느낀 감정이나 생각들을 재미있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순수한 아이의 감정으로 현실을 바라본다면 좀 더 세상은 투명해질까.

남들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기보다, 온전히 나를 잘 알고 당당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의지를 길러야 한다는 말을 길게 풀어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후루룩 간이역에서 먹는 우동같은 맛이 있는 책.

옆에는 유투버 빠더너스 문상훈의 첫 산문집.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위트 있으면서도 솔직한 타인의 생각을 대놓고 엿보기에 산문집처럼 좋은 책은 없다.

역시 일기를 쓰는 사람은 글솜씨가 좋다.

중간중간 작가의 친필 글들이 그가 나에게 쓰는 편지처럼 느껴졌다.

활자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소소하지만 특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재미로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부리나케 지나 벌써 서점에 들어온 지 30분이나 되었다.

실시간 버스의 위치를 확인하니 여유시간이 12분이나 남았다.

그래도 늦으면 안 되니까 빠른 걸음으로 신세계 센텀시티점을 나왔다.

인파를 뚫고 지나가면서 스펀지밥과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인생은 스펀지밥처럼.

네모바지 스펀지밥과 징징이와 뚱이.

동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른들이 정말 많다.

어린이보다 어른이 많은 스펀지밥 동네를 벗어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좋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지면 더위에 치솟는 불쾌지수가 1도 정도는 내려가지 않을까.

중간에 재밌는 비디오 촬영기기가 있어서 후딱 사진 한 장 찍고 바로 버스 타러 가기.

부산에서 버스를 타는 이유

부산은 운전하기가 참으로 상그럽다.

반대로 버스를 타면 드라이브가 더욱 즐겁다.

버스를 타고 광안대교를 지나면 보이는 광안리 해수욕장과 반대편으로 드넓은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여행의 기분이 물씬 난다.

1006번은 직행 버스이기 때문에 드라이브 코스로는 길지만, 정차하는 역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태종대까지 생각보다 금세 도착한다.

태종대 도착하기 직전 만나는 흰여울마을에서 대거 하차하는 승객들을 보며, 계획을 변경해서 나도 여기서 내릴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시 하다가 흘려보냈다.

그래 여름엔 태종대지.

그렇게 한국 해양대학교를 지나 종점인 태종대에 도착했다.

태종대와 여름에 빛을 발하는 다누비 열차

군사시설로 이용되다가 1960년대 유원지로 등록되어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넓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어서 차를 가지고 오면 편하다.

잘 만들어진 유원지의 특징은 어디서나 보이는 화장실이다.

바다를 보면서 조용히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휴가철의 부산은 어디서나 인산인해다.

사람 없이 여유를 느끼고 싶으신 분은 여기, 태종대로 오시면 됩니다.

태종대 산책로의 시작은 완만한 길을 추천합니다

태종대 입구에 다다르면 다누비 승강장이 있다.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고 완만한 길로 향했다. 날 더울 때는 굳이 무리하지 않는다.

한여름의 산책길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주로 커플들이 많았다.

나는 무적이다. 날 더울 땐 옆자리를 비워둬야 시원한 바람을 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지칠 무렵 웃통을 벗고 달리는 청년들 무리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청춘이다.

시원한 바닷바람, 따사로운 햇살과 높다란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한여름의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끓여 먹으면 좋은 약수와 한여름에도 싱그러운 수국

중간중간 약수터와 화장실이 보여서 마음이 편했다.

물을 마시려고 보니, 안내문구가 친절하다.

식수인증을 받았지만, 끓여 먹으면 좋다는 약수.

장염을 달고 사는 나는, 내가 가져온 생수를 마시며 나의 건강을 기원했다.

수국으로 유명한 태종사도 보았다.

5월부터 개화가 시작되어 7월까지 절정으로 피어나는 수국을 8월에도 볼 수 있다니.

변덕스러운 수국이 나를 기다려줬구나.

너의 순수함과 짓궂은 모습에, 더위에 구겨졌던 내 마음이 다시 활짝 펴진 기분이야.

더워서 사람들이 다누비 열차를 이용해서 태종대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나의 다리를 이용해서 더 천천히 태종대를 즐길 수 있었다.

다누비 열차 이용안내와 있을 건 대충 다 있는 전망대 매점

산책로에는 사람이 없지만, 전망대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늘을 지키는 사람들.

약 1,7km를 걸어서 도착한 나는 전망대를 보니 열차를 타고 간 사람들보다 더 전망대가 반가웠다.

나무에 가려졌던 드넓은 바다의 모습, 강렬한 바닷바람.

땀 흘린 보람이 있는 멋진 조망이었다.

그리고 있을 건 대충 다 있는 전망대 매점이 귀여웠다.

전망대에서 당신에게 주는 선물은 미소와 복주머니다

전망대 바로 앞에는 모자상과 심쿡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소년이 맑게 미소 지으며 하트를 손가락으로 찌르고 있다.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사랑의 무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

어제보다 행복한 오늘은 내일의 행복을 위한 마중이라고 말하는 소년 덕에 더 좋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의 사랑을 걱정하기보다 오늘의 최선을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는 복주머니는 다만 복을 빌어줄 뿐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보이는 부산 바다와 선박들의 모습

사람들 북적한 전망대를 뒤로하고 걸으면 다시 내 앞에는 뻥 뚫린 세상에 기다리고 있다.

태종대를 걷는 완만한 길에서는 그늘이 함께 했지만, 출구로 향하는 길은 따스한 햇볕이 나와 함께 했다.

눈부신 와중에 보이는 탁 트인 바다.

절벽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산책길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로 참 좋은 곳.

바다 위에 떠 있는 저 배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떤 희망을 싣고 가려는 걸까.

세상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은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며 제 몫을 해내고 있는 듯하다.

멈추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차곡차곡 자라나는 사람들의 노력과 염원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내는 동력일 것이다.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누군가는 묵묵히 제 앞길을 걸어가고, 또 다른 이는 역행을 하고, 누군가는 뛰고, 혹은 잠시 쉬기도 한다.

그래도 세상은 별일 없이 흘러간다.

무더위에 사람들은 보다 시원한 길을 택한다.

다누비열차는 성수기에는 10분 ~ 20분 간격으로 태종대 투어를 수월하게 해 준다.

나는 오롯이 내 두 다리를 이용해 태종대를 천천히 즐겼다.

그중에서도 뛰어가는 사람, 천천히 가는 사람, 쉬어가는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다.

자유의지.

이렇게 자유분방한 세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하루였다.

더위에 지칠만 하면 시원한 그늘을 주고, 앉을자리가 있고, 바닷바람을 날려준다.

무더위에 태종대 걷기는 꽤 괜찮은 여름 나기다.

해수욕도 좋지만, 산림욕과 함께하는 바다보기를 추천한다.

그렇게 나와 당신의 여름을 상쾌하게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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