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바라 본 하늘
집 = 돈?
서울 안에 전세 값이 일반 회사원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오른 요즘, 주(住)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한 돈이다. 얼마 전 만난 친구는 12월에 결혼식을 앞두고 신혼집을 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신혼부부가 집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호소한다.
“여건에 맞는 집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야. 우선 돈도 많이 필요하고 따져야 될 것도 많은데 매물은 별로 없어. 그러니 그냥 돈에 맞춰 집의 구색만 갖추면 들어가야지 뭐”
서울 하늘 아래 내가 살 곳의 깃발 하나 꽂기 힘든 현실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집’을 이야기한다면 몽상가나 철없는 사람으로 몰리기 쉽다. 이에 앞서 우리가 집(건물)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훑어보자. 오늘 아침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를 돌이켜 보면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내 방 천정이 보이고 이내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실내에서 대부분 생활하는 도시인에게 하늘과 땅은 출퇴근할 때나 잠깐 밟는 공간이 되었다. TV에 나오는 의자 광고 문구처럼 인간은 ‘집(건물)에서 또 다른 집으로 옮겨 사는 존재’가 된 지 오래다.
집이라는 공간에 갇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에게 무제한으로 허락된 것 중 하나가 하늘이다. 창문을 통해, 옥상에서, 베란다에서 우리는 고개 들어 위를 바라본다. 오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서 주인공이 떨어지는 잎새보다 그 바깥에 있던 하늘을 바라보았다면 소설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집의 모든 곳에 하늘은 숨어있다. 수많은 아파트와 주택 조감도에도 푸른 하늘은 빠지지 않았고 우리가 집 사진을 찍을 때도 하늘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보호받기 위해 만들어진 주거라는 공간에 갇혀 있다. 그러다 보니 하늘은 직접 맞닿은 공간이 아닌 멀리서 바라보는 피사체가 되거나 잊힌 지 오래다. 이 글을 쓰면서 오늘 처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늘을 보며 살고 있을까?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하늘이다. 하늘은 밤낮으로 디자인을 바꾸고 시간과 계절에 따라 수시로 변하지만 우리가 이를 즐기고 이용하는데 따로 비용이 들지 않는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은 어느 순간 특정한 소수만이 온전히 누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나 초고층 건물은 하늘 그림의 한쪽을 가져가 버렸다. 인간이 존재한 이래로 하늘은 언제나 함께 해왔지만 우리는 건물에 갇혀 바닥을 바라보며 한숨 쉬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집이라는 공간에 갇혀 하늘이라는 천정을 묻어버린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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