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한나 Dec 29. 2021

빚 갚으러 가자!

2022년 채무 상환의 해

"여보, 그렇게 슬퍼?"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던 남편은 밤마다 드라마를 보며 훌쩍거리고 있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남자였지만, 이 남자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 남편은 드라마는 드라마고, 영화도 영화일 뿐이라며 종료 시점과 함께 깔끔하게 자신의 감정도 막을 내리던 사람이었다. 반대로 나는 극에 너무 감정을 이입하며 "여보~ 여보라면 저 상황에 어떻게 할 거 같아?"라는 질문으로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자처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야~ 골치 아파! 상상 좀 하지 마~ 너한테 저럴 일 절대 안 생겨! 대화를 질문으로 하지 말라고! 물음표 말고 그냥 점으로 대화를 하면 안 돼?"냐는 말을 하며 자신은 이미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렇게 드라마와 현실을 명확히 구분 짓던 남편이 달라진 것이다.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 결정적이 드라마가 있었으니... 내용은 이러하다.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 포스터

연애시절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난 부부.

그렇게 결혼생활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중 남편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바꾸고자 아내를 만나기 전 시간으로 돌아간 남편은 아내와의 첫 만남을 거부하고, 다른 여성을 선택한다. 그렇게 행복대로이면 다행인데... 결국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는 건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전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왠 일! 지독했던 아내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니 예전 모습 그대로 밝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극 중 남편은 결혼생활 내내 억척스럽게 변한 아내가 어쩌면 자신 때문일거라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이후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편은 드라마가 끝나면 쫄랑쫄랑 와서는 "여보 내가 잘할게. 여보 변하지 않게 내가 더 잘할게. 우린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이대로 살자"라는 말을 속삭여댔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말한다.

'이 남자...... 급진적 노화를 맛보고 있군.'


남편이 보는 드라마처럼 한 번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종종 해보곤 한다.

단, 지금의 기억을 다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전공을 선택해보고 싶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법한 행동들은 하지 않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부모님을 설득해 삼성전자 주식을 차곡차곡 샀을 것이다~ 크크크크(한국의 워런 버핏이 되는 것인가?)


사실 워런 버핏까지는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지난날의 잘못들을 되돌리고 싶다.

'왜 그리 철없이 굴었는지... 왜 그리 배려하지 못하고 왜 그리 무책임했는지...' 후회 가득한 시간들...

어린 시절의 나는 싸가지 없고 되바라지기로는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어렸다 해도 어떻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그렇게 없는 건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다(물론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지금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딱 여기까지만 썼다. 뭐라도 쓰고 싶어서 시작한 글쓰기인데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내 마음은 무거워졌고, 머릿속은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바꿀 수도,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무기력해졌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고 이 글은 며칠간 브런치 서랍 속에 보관되었다.


며칠이 지난 오늘,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중 어떤 뉴스를 접하게 되었고 이렇게 글을 쓴다.


A씨는 한 겨울날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허기를 느끼고 신촌시장 뒷골목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던 아주머니에게 홍합 한 그릇을 외상으로 얻어먹었다. A씨는 다음날도 돈을 마련하지 못했고 얼마 뒤 군에 입대했다. 제대 이후에는 미국 이민길에 오르면서 홍합 한 그릇 외상값은 갚지 못했다.

편지에서 A씨는 “지난 50년간 당시 친절하셨던 아주머니에게 거짓말쟁이로 살아왔다는 죄책감과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왔다”며 “이제 삶을 돌아보면서 너무 늦었지만 어떻게든 그 아주머니의 선행에 보답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적은 액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편지를 보내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역 내에서 가장 어려운 분께 따뜻한 식사 한 끼라도 제공해 주시면 한다”고 부탁의 말을 남겼다.

서울신문 <"마음의 빚" 50년 전 홍합 한 그릇 값 수표로 갚은 노인> 기사의 일부


뉴스를 읽으니 서랍에 있는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과거 모습을 떠올리며 후회로 찌들기보다 A 씨처럼 용기 내 한발 짝 앞으로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친절한 아주머니 선행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처럼 나 또한 나로 인해 힘들었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한 발자국 내디뎌야 하는 것이다.


'선생님,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선생님을 놀리듯 말하며 화를 냈던 제 행동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오죽했으면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나는 선생님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학생이었기에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학생 혹은 학습자들을 향해 이를 갈며 분노하기보다... 지난 내 모습을 떠올리며 넓은 마음으로 품겠습니다.


'어린 시절 뮤지컬을 처음 접했을 때 잔뜩 허세 부리며 유치하다고 나불거리던 무례한 행동... 배우님들 혹시라도 제 행동을 보셨다면 용서해주세요. 아무리 어렸다 한들 어찌 그리 행동할 수 있었을지 저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사죄하고 싶어요....'

타인의 감정은 헤아리지 않은 채 제멋대로 굴며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나는... 손해 보는 상황을 마주해도 입에 거품 물며 흥분하지 않고 묵묵히 멈추어 있겠노라 다짐해 봅니다. 운전할 때도 클락션을 미친 듯이 때려 누르기보다 웬만한 건 넘어가겠습니다.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야겠습니다.

2022년에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p.s. 나를 돌아볼 수 있고, 조금 더 괜찮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쓰기'는 사랑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