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로 May 06. 2023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반드시.

부조리한 힘의 끝을 체감하며, 나의 세계의 색이 바뀌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무렵이다, 내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시작한 때는. 그 당시는 매일이 전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언제 어디서 내게 화살이 날아올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전투가 한창인 전장 한복판에 홀로 서있었다. 익숙한 쓸쓸함.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비장한 음악을 골라 들으며 전장으로 향하곤 했다. 커다랗고 튼튼한 신발을 신으면 마음이 더 든든했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며 충돌과 갈등이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과녁이었다. 내가 고꾸라져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화살은 사방에서 멈춤 없이 날아올 참이었다. 삶에 미련은 없었으나 무용하게 머무르다 부당한 화살촉에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은 일이었다. 내가 과녁 삼아도 좋을 만큼 유약해 보인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나는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질주했다. 조용하고 정확하게 적장의 눈앞까지 달려 몇 번이고 그 목에 단도의 끝을 겨누었다. 허무한 경멸감. 뿌옇게 구름이 맺힌 무채색의 눈빛으로 붉은 살갗의 타조 같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너지는 자존심을 세워보려 꽉 깨문 입술에 피가 맺혔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동공이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이 쓸모없는 목을 따버리면 지워지지 않는 검은 피가 솟구쳐 나를 덮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대신 제안을 하곤 했다. "나를 부디 내버려 둬. 서쪽 해변에서 담배 한 대 태우며 노을이나 감상하도록." 


불필요한 전투의 결말은 반복되었다.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으면 나 역시 빈 손으로 나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 전투의 시작 역시 반복되었다. 해 질 녘 나를 전장으로 불러내어 일몰의 휴식을 훼방 놓는 것. 근본 없는 적의에 마음이 헐고, 끝을 내기 까다로워 언제나 녹초가 되었다. 지겨운 피곤함. 어릴 적부터 전투는 일상이었다. 나의 숙적이자 스승,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사투로 싸우고 버티는 법을 배웠다. 제 아무리 아프다 해도 아버지도 아닌 자에게 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아직 무른 내가 아닌 그의 단도였다면 적장은 이미 사지가 수백 번은 더 찢겼을 것이다. 


부당한 발길질이 싫었다. 나에게 부당한 것은 물론, 내 사람들에게 부당한 것은 더욱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럴 때면 늘 소원을 이루어주는 반짝이는 조약돌을 한 움큼 손바닥에 올려놓고 흔들어 보여주곤 했다. 그 발을 핥으면 우리 것이 된다 했다. 찰나의 굴욕으로 우월감을 선물하는 것,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던져진 조약돌을 주워가는 것. 그러기엔 난 미련하게 정의롭다. 영원을 단언하는 왕좌에 앉아 깔보듯 바라보던 그 모습이 싫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몇 번이고 달려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옳지 않은 것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는 내가 세상의 불합리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크길 바랐다. 고집스럽게 세월이 흘렀고, 울며불며 무작정 칼을 휘두르던,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던 어린아이가 꽤나 훌륭한 검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연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창조주를 넘어서야 하는 소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버지가 암 말기 선고를 받고 돌아가시는 데까지는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부친의 죽음에의 1차적 애도와 슬픔, 그 너머의 한층 더 복잡한 감정들은 내가 세상을 대하는 시선에 친절하게 반론을 제기했고 나의 신념을 담은 개똥철학을 재검토했다. 그를 반드시 이겨보기 위해 기를 쓰고 살았다. 그런데 갑작스레,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까지 강하고 지독한 존재는 당연히 영생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나는 죽음이라는 변수를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픔 속에 목소리를 잃고, 지옥을 보는 눈으로 두려움에 떨며 고통받다, 가까스로 편안해지자 뼈만 남은 모습으로 떠났다. 누구보다도 강한 그 기질 그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싸웠다. 끝까지 나에게 한 번쯤 져주는 일 따윈 없었다. 우리는 그가 흔들던 조약돌들을 주머니에 나누어 넣어 목에 걸었다. 날숨엔 화려하고 무거웠고, 들숨엔 수수하고 가벼웠다. 부조리한 힘의 끝을 체감하며, 나의 세계의 색이 바뀌었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내일일 수도 있고, 기약 없는 먼 미래일 수도 있다. 나에게 적의를 가진 자들, 불합리하게 대우하는 자들. 내가 죽이지 않아도 언젠가 반드시, 알아서 죽는다. 그리고 그 끝은 놀랍게도 공평하다.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달리 느껴졌다. 적병들의 얼굴은 길 잃은 아기 참새처럼 가엾어 보였다. 이들은 어째서 나를 죽이기 위해 발버둥 치고 고통받으며 소중한 하루를 낭비하는 걸까. 나의 시간은 귀하다. 이들에게 소모하고 싶지 않다. 나는 서쪽 바다의 붉은 노을에 온전히 물들고 싶다. 우긴다고 무릎 꿇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의 목을 베러 가지도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토록 원한다면, 너의 화살촉은 내 심장을 관통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조약돌 주머니를 목에 건 채 바다에 던져져 다시 태어날 것이다.  


22살의 어느 추운 날, 또 한 번의 대결. 그의 검에 당해 숨만 겨우 붙어 있던 내게 그가 말했다. "너는 연하게 살아라"라고. 그가 사라지고야 그 말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우리는 닮았다. 

작가의 이전글 시간을 뒤트는 부드러운 날갯짓.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