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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pr 14. 2023

흐린 너를 보내니 찬란한 네가 왔다.

끈질기게 갈구하던 나의 봄과 이별했다.

4월 둘째 주가 시작되었다. 미덥지 못한 일기예보 앱을 열어보았다. 완연한 봄이라며 자신 있게 들이민다. 지금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눈이 내리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집에서 입고 있던 적당히 칙칙한 운동복에 죽은 녹색 겨울패딩을 걸쳤다. 봄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 지 오래지만, 아랑곳없이 흐리고 스산한 날씨가 이어져왔다.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뉴욕의 봄은 왠지 매년 짧아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내 마음의 봄도 늘 먹구름을 몰고 다녔다. 따뜻한 봄날의 공원 잔디밭에 누워 하염없이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던 때도 있었는데, 참으로 까마득하다. 나는 그렇게 여느 때처럼 별 기대 없이 나의 엉뚱하고 기복 있는 반려견, 희로와 함께 아침 산책을 나섰다.


이게 웬걸, 진정 봄의 시작이었다. 동화에서나 이야기할법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 뭉게구름 낀 말간 물빛 하늘 아래 분홍빛 띄는 고급스러운 백색의 공기. 레몬빛 햇살이 나를 흠뻑 적시곤 허드슨 강 수면의 윤슬이 되어 반짝거렸다. 이런 완벽한 봄날, 만개한 커다란 벚꽃나무가 봄바람에 섬세하게 흔들리는 모습은 항상 머릿속 한켠에 슬로 모션으로 남는다. 학창 시절 학교 앞 골목에서 마주친 너에게 첫눈에 반하던 그날처럼, 잔 가지들의 리드미컬하고 가녀린 몸짓, 꽃잎의 서정적인 흩날림이 모두 영화처럼 눈앞에서 천천히 재생되었고, 세상의 소리는 두근거리며 쏟아지는 빛에 먹혀 부드럽게 부서지고 흩어졌다. 도시의 밤거리, 인문학적 불빛들을 선물 받았던 그날처럼 웃었다. 그렇게 바보처럼 웃으며 평소보다 오래, 희로가 지쳐 내 발길을 돌려보고자 길 한 복판에 주저앉을 때까지, Mild High Club의 음악을 들으며 강변을 걸었다. 나의 세계가 나의 새 출발을 응원한다.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나란히 출발선에 서서 나를 독려한다.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앞뒤재지 않고 용감하게 사랑에 빠졌다.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좀처럼 오지 않던 지난봄을 떠올려 보았다. 매일같이 흐리고 툭하면 비가 내렸다. 꽃이 피고 지는 내내 겨울이었다. 어두운 무채색의 도시는 불친절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따뜻한 이국의 바람들은 내게 함께 떠날 것을 권했다. 나는 그래도 올곧게 기다리면 나의 봄을 만날 것이라 생각했다. 늘 와줬으니까, 겨울 다음에 봄은 반드시 오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기다리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봄은 오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여태 겨울이냐며 실망하던 그 야속한 날들은 마음의 문을 닫은 채 내 곁을 스쳐 지나던 봄이었다. 나에게 눈길을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시작부터 잘못된 기다림이었다. 망설임 없이 바람에 올라탔어야 했건만, 나는 혼돈 속에 순진하게 정체되었다. 막막함이 시야를 가려 세상과 단절되었다. 씁쓸한 깨달음과 함께 나는 끈질기게 갈구하던 나의 봄과 이별했다.


새로운 찬란한 봄이 나를 왜, 어떻게 찾아온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원래 지금쯤 도착할 예정이었을까? 단순히 기후 변화를 겪고 있는 지구의 변덕인가? 아니면 나의 이별이 불러낸 건가. 어느 것이든 좋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불러주는 봄의 노래가 그저 편안하고 사랑스럽다. 매일같이 산책로의 적당히 볕 좋은 곳에 앉아 봄에게 말을 걸고 노래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잘하기 위해서 잘하는 것,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내 등을 다독여준다. 이제는 더 이상 공격받아야 할 일도, 투쟁해야 할 일도 아니니 안심하라고 한다. 일기예보도 늘 틀리는 것은 아니라며 무작정 못마땅해할 일은 아니라고 나른한 목소리로 설명해 준다.


이래저래 오늘도 난 뭔가 글을 쓸 생각에 옅게 흥분하며 아침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이게 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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