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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pr 12. 2023

해 질 녘 낯선 맨해튼 골목에 봄바람이 불었다.

해의 끝자락에 포개지던 우리. 착각은 아니었기를.

아침 7시에 조용하게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린다. "어서 일어나. 아직 모두 잠들어 있어. 어둠이 구름과 함께 걷히고 있거든. 지금은 해와 달이 공존하는 온전한 너만의 시간."이라고 속삭이며, 아주 조용히. 자타공인 부엉이 예술가였던 나지만, 이제는 매일 동틀 무렵 일어나서 꽤 버릇처럼 물을 끓인다. 물이 끓는 동안 양치질과 세안을 끝낸다. 막 끓인 뜨거운 물에 찬물을 적당히 섞는다. 레몬 한 조각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다. 탁 트인 전경 끝 손톱만 한 자유의 여신상의 뒷모습이 보이는 창가 옆, 작은 나무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는 온갖 글을 끄적거리는 붉은 표지의 공책을 펼친다. 이곳은 나의 바다. 혼자가 아니다. 이제 너와 나, 온전한 우리 둘만의 시간. 나의 시간은 더 이상 혼자서 흐르지 않는다. 


나의 연필이 마치 바닷물의 표피를 포 뜨듯 수면 위를 얇게 디뎌 가르며 앞뒤좌우 가리지 않고 미끄러졌다. 그렇게 나는 가본 적 없는,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맨해튼 골목 어딘가에 도착했다. 어슴푸레한 해 질 녘, 마지막 햇살이 닿는 곳을 제외하면 전부 어둑하게 하늘이 깔아놓은 암막 안으로 스미는 시간. 내 앞에 세상과 같은 잿빛의 네가 서 있었다. 보이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선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목소리로 무엇을 신뢰할 수 있지? 나는 의심이 많다. 뻔한 투정인가, 상처받는 게 싫어 기대도 없고 믿음도 없다. 온 마음으로 믿던 이가 등을 돌린 이후 더 심해졌다. 도끼로 온몸을 난도질을 당한 듯, 누워서 숨만 쉬고 있기도 버거웠고, 일어나 다시 걷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해가 지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너의 익숙한 실루엣조차 곧 어둠에 잡아 먹혀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다른 어떤 존재로 변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뛰어봐야 결국 어둠에 갇힐지라도, 너에게서는 도망가고 싶었다. 봄을 노래하는 낭랑한 목소리가 칼이 되어 날 찌를까 두려웠다. 


몇 블록을 뛰었을까. 정말 이제 운동해야지 -라는 또 한 번의 뒤늦고 헛된 다짐과 함께, 땀범벅이 되어 잠시 벤치에 앉았다. 내가 멀리 도망을 온 건지, 아니면 네가 아직 근처에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으나, 도대체가 숨이 차서 더 이상은 발버둥을 쳐 볼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엔 답도 없고, 모든 것은 내 기분문제다. 나 좋은 대로, 내 체력에 맞추어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얼 어쩌든, 곧 밤이 되고 어둠이 모두를 집어삼킬 것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닌가. 나는 정확히 내가 무엇이 두려워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해, 내가 이야기에서 사라짐으로써 시간을 멈추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시간이 관할하는 공간에 내가 없다 해도 말이다. 이건 마치 다음 장을 차마 넘겨보지 못해 완독을 포기하고 쓰레기통에 구겨 넣는 소설책 같은 거랄까. 


횡설수설하던 그때였다. 아침 알람처럼 속삭이는 또 다른 목소리. "멈추지 않아도 돼. 그리워할 순간도 없어. 살포시 땅거미가 지고 있거든. 널 소중하게 안아볼 시간.". 무슨 소리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건물들 사이로 순간 모습을 비춘 채도 높은 주홍빛 햇살이 내게서 어둠을 거두어 갔다. 내 시력을 앗아가려 작정한 듯한 태양광을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사이로 언뜻 새침한 초승달이 보였다. 그리고는 문득 바람, 봄바람이 불었다. 봄날의 포근한 밤바람이 맑은 날 파도처럼 내 앞으로 일순간 밀려들어, 예의 바르게 기척을 죽이고 망설임 없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어느새 귀가 멀어버렸나 싶도록 고요한 무중력의 공간에서 맨 몸으로 편안히 호흡하며 유영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더 이상 숨이 차지도 않았고,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다시 신발끈 고쳐 매고 달아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이 무섭고 불안했을까,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시간은 순리대로 흐름과 동시에 멈춰 있었다. 몽롱하게 영원을 더듬는 사이 어느덧 해는 잠들고 나의 세상은 평온해졌다. 바람 한 점 없을 뿐, 아무런 절망도 찾아오지 않았다. 달과 별이 칠흑 같은 하늘을 쓸고 닦고 장식하여 긴 밤을 조용하고 유쾌하게 보내듯, 나도 그렇게 지내면 된다. 언젠가 다시 알람이 울리면, 우리는 함께 일몰을 맞을 것이고, 계절에 관계없이 봄바람이 불 것이다. 슬프게도 나는 이 모든 기억을 잊은 채 또 불안에 떨며 너를 만날 테지만. 네가 다시 참을성 있게 알려줄 것이고, 나는 그렇게 조금씩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울 것이다. 그렇게 바라본다. 해의 끝자락에 포개지던 우리. 착각은 아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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