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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pr 11. 2023

프롤로그: 늘 그렇듯, 뉴욕으로 돌아오던 날.

허나 공허함은 여전했고, 나는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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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자, 후각이 시원치 않음에도 축축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불쾌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낙후된 시설, 어수선한 분위기에 기운이 빠졌다. 인천공항에서 돌아올 때면 매번 이렇다. 인천공항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넓은 거지, 걷기가 힘들어"라고 불평해야 할 만큼 넓고, 모든 것이 깨끗하게 구비되어 있는 현대적인 공간이다. 면세점을 둘러보면 유명한 명품 브랜드가 즐비하고, 점원들은 친절하고, 어느 곳이나 보기 좋고 아름답게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드넓은 공항 내부 이곳저곳을 돌아보면 어쩐지 모두들 공항에서의 쾌적한 시간을 누리는 것에 익숙한 모습이다. 입출국 수속도 군더더기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반면 뉴욕 공항은 낡고 번잡하다. 뭐, 비교하지 않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쓰레기더미가 쌓여있는 것도 아니고, 뉴욕을 찾는 무수히 많은 입출국자들을 위해 해야 할 기능을 모두 하고 있는 의젓한 공항이니까. 하지만 오래된 탓에 비교적 훨씬 좁고 복잡하다 보니, 인천공항을 통해 이곳에 도착하면 적어도 수십 년 전 과거로 돌아간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나의 사회적 계급이 부쩍 낮아진 것 같은 - 딱히 계급장 같은 걸 달고 사는 것도 아닌데도 - 까끌까끌한 위화감도 생긴다. 진지하게 공항 탓을 하고 있지만, 그저 공기 속에 흩어져있는 나의 무의식이자 뒤틀린 현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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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건물 안에서 우버 콜택시를 부르고, 픽업 장소로 가기 위해 회전문을 통해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깜깜한 저녁이었고 차갑지만 춥지 않은 바람이 불었다. 건너편 주차장으로 향하는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서 기다리면 된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어딘가 불편하고 답답한 이 공항을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옆을 흘끗 보니 정통파 유대인 청년이 복장을 갖춰 입고 오른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 붙든 채 왼손으로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 정말 뉴욕에 돌아왔나 봐.'. 웃기는 일이다. 비행기로 15시간을 날아왔고 입출국 절차를 모두 마쳤다. 공항이 번잡하다고 불평하며 집으로 향하는 콜택시를 불렀다. 그럼에도 자신이 지구 반바퀴를 돌아 뉴욕에 도착했다는 걸 체감하지는 못했던 거다. 공항에서는 국가별 혹은 도시별 특색이 부각된다기보다는, 전지구적 관점에서 시공간이 공유된다는 느낌이 있다. 거주하는 아파트의 공공시설 같은 거랄까? 아파트 각 호마다 다양한 개인 혹은 가족들이 저마다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살고 있지만, 공공시설에서는 모두가 그저 하나의 시설을 함께 이용하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된다. 다른 아파트에 있는 공공시설이어도 별 상관이 없다. 뭐든 그렇게 단순하게 뭉뚱그려져 버리니까.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서 짐을 풀고 첫 외출을 할 때까지는 보통 이로 인한 인지부조화의 연속이다. 오늘은 마침 바깥공기와 함께 시야에 박힌 유대인 청년 덕분에 적응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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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가 도착했다. 집까지는 한 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무겁게 둘러메고 있던 가방들을 내려놓고 편안히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곳저곳에 내가 무사히 - 딱히 무사하지 않을 시에 별도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 뉴욕에 도착해 집을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창밖을 몽롱하게 바라보다가, 인스타그램을 뒤적였다가, 눈을 감았다가를 반복했다. 무척이나 피곤했음에도 딱히 잠이 오지는 않았다. 문득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바깥 풍경을 차근히 훑어보았다. 뉴욕의 상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20년쯤 전 처음 보았을 때의 설렘은 이제 없지만, 반갑기는 하다. 말인즉슨, 매일 다른 색의 조합으로 점등되는 빌딩 조명을 볼 때마다 그날의 색의 의미를 궁금해 하지만, 굳이 그게 무엇인지 검색해보지는 않는 것이다. 그 정도의 관심이고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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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늦은 시각인데도 차가 꽤 많이 막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예상보다 오래 내 창에 머물러 있었다. 파란색의 조명은 생경하다고 생각하며 '내가 (또) 뉴욕에 돌아왔다'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뉴욕은 '돌아오는 곳'이 되었을까? 언제부터 나는 더 이상 한국에 '돌아왔다'라고 표현하지 않게 된 걸까. 또한 어째서 그와는 별개로 어느 곳도 나의 고향도 집도 아닌 걸까. 어디에서나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여행객, 혹은 불청객처럼 지낸 날이 길어서인지, 나는 나의 공간의 의미를 잘 모르고 애착을 갖기 어려워한다. 전 회사에서 자신의 업무공간을 가족사진, 좋아하는 물건, 예쁜 화분 등으로 소중하게 꾸미는 동료들을 많이 보았다. 그것이 늘 신기하고 멋져 보여서,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멋쩍은 기분으로 슬쩍 구경하곤 했다. 나도 뭔가 꾸며볼까 했지만 해본 적이 없어 어색하기만 하더라. 언제든 무관심의 바람이 불면 흔적 없이 날아갈 사막의 모래라는 마음가짐으로 적당히 스며사는 것이 더 익숙하다. 마지막 직장을 떠날 때도 그랬다. 적막한 바람이 불었고, 그걸로 끝이었고, 나는 편안했다. 나를 태운 바람자락이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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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랜드 터널만 통과하면 집은 금방이다. 터널 근처에 다다르자 평소에 못 보던 사인이 있다. 오늘 밤에는 터널을 닫는다고 한다. 운전기사와 나는 동시에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이제 빙 돌아서 링컨 터널을 타야 하고, 교통체증도 꽤 있으니 대략 한 시간은 더 소요될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럴 때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일 텐데.'라고. 뉴욕은 명실공히 매력 넘치는 세계 최고의 도시들 중 하나다. 하지만 어느 것도 누구에게나 완벽할 수는 없다. 한국인의 기준으로는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이 느리고, 일의 진행이 깔끔하고 사려 깊지 못해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한국인 고유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한의 정서는 울분 섞인 '네가 감히?'의 정서라는 우스갯소리를 일전에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이곳에서 '네가 감히?'라는 말을 얼마나 숱하게 반복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일리 없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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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링컨 터널을 향했다. 우리와 같은 운명의 다른 많은 차들도 같은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창밖을 내다보며 확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저 언제든 좋으니 무사히 도착이나 했으면 - 하며 눈을 감았다. 이런 대책 없이 속만 뒤집어지는 일이 빈번한 곳이다. 뉴욕에 살면서 나는 기다림과 불편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특히나 이방인인 나는 언제나 반드시 기다려야 하고 불편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내 상황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나 내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는 사람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기다리기 싫어!", "불편해! 싫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미국생활에 여러모로 더 확장된 자유를 제공하는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나의 인생 목표가 되어있었다. 황당한 소리지만 그랬다. 삶의 모든 선택과 계획을 그 목표에 맞춘 채 7년을 살고, 운이 따라주어 목표를 달성하고, 서른을 맞았다. 내 딴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스스로 정한 커다란 목표를 달성해 본 셈이라, 무척이나 기뻤다. 나를 집어삼킬 듯 검게 일렁이는 두려운 심해 어느 곳에서, 수천 년에 한 번 만들어지는 희귀한 보석을 찾아 손에 쥐고 용감하게 수면 위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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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체증 속에 택시는 돌아 돌아, 나는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합 2시간이 좀 넘게 걸렸고 물론 요금도 예상보다 많이 나왔다. 차가 많지 않으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는 시늉도 못한 채 침대에 쓰러졌고, 잠이 드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정도 잠들면 좋겠다 싶은 피곤함이었지만,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라 한 새벽에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오늘부터 무엇을 하며 지내는 거지?'. 집에 올 때엔 분명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내일은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는데, 다시 균형을 잃어버렸다. 영주권을 취득한 다음 날이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자유를 갈망하며 심해에 몸을 던져 내 소원을 이뤄 줄 보석을 손에 넣었다. 무섭지만 짜릿한 모험이었다. 햇빛에 그을릴까, 달빛에 얼어버릴까, 품에 꼭 안아보았다. 허나 공허함은 여전했고, 나는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얻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원하던 대로 부당한 것에 '싫다'라고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이 많았기에 담대해지는 법을 배웠다. 바닥을 쳐도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굴곡 있는 성취에서 오는 자신감도 생겼다. 문제는 - 내가 꿈을 이루어 버렸다는 것. 그렇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신분증 하나가 내 꿈의 전부였다. 그다음엔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떠한 다른 꿈을 가지고 살아야 좋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20대의 내가 처음으로 이룬 꿈은 터무니없이 근시안적이었고, 하루아침에 나는 꿈이 없는 껍데기뿐인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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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마음이 텅 비어버린 기분으로 새벽에 잠이 깬 나는, 영주권을 취득한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난날의 나이자 현재의 나다. 그간 나름 치열하게 타협 없이 살았고, 영주권은 시민권이 되었고, 그럴싸한 직업도 가져봤고, 회사에서 큰 소리도 쳐봤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하지만 앞으로 10년, 20년, 계속 살던 대로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 그렇지도 않다. 그리하여 나는 꾸역꾸역 관성에 떠밀려 가던 발걸음을 멈춰보기로 했다. 온종일 글을 읽고 쓰고 싶고, 사진을 찍고 싶고, 그것들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다. 나의 일상과 상상, 통찰을 기록하여 세상에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를 꾹 악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용감하게 헤쳐나갔던 그 심해의 모험을 아직 기억한다. 이 글이 미약하나마 나의 다음 모험의 시작점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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